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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교산행

대구 동구 옻골마을,대암봉

by 우보72 2024. 4. 11.

거북바위에서 바라본 옻골마을

대구시 동구 옻골마을

대구시 동구 둔산동에 있는 옻골마을은 마을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의 지형이 남쪽을 제외한 3면이 산으로 둘러 쌓여 있으며, 주변 산과 들에 옻나무가 많아서, 옻골이라고 불리었다는 유래를 가지고 있다.

1616년(광해8년) 조선 중기의 학자 대암 최동집이 이곳에 들어와 살면서 경주 최씨의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

일시: 2024년 3월 6일

옻골마을-옻골재-대암봉-거북바위-옻골마을

도상거리:약 7.30km 정도

소요시간:약 3시간 정도 20분 정도(휴식 포함)

 

 

 

 

 

옻골마을 주차장에 주차하고 시작한다.

먼저 옻골마을 구경하고 대암산 한바퀴 돌아볼 예정이다.

주차장 지나서 입구에 비보숲 보인다.

수령 350여년의 아름드리나무들은 마을의 터가 주변보다 높아 금호강 지류가 훤히 내다보이므로

나쁜 기운이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경계하고자 심었다고 한다.

연못

옻골마을 입구

고택들 구경하고 대암봉 올라 좌측으로 내려설 예정이다.

옻골마을 전경

삼징사추모비

"옻골마을 입향조 대암 최동집,백불암 최홍원,지헌 최효술선생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지만 징사(徵士)로 추앙을 받았으며, 자연과 더불어 살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사이에 우애가 있는 것이 천지의 이치에 맞는다고 보았다. 수신으로는 경공부, 제가로는 가문과 향촌이 더불어 사이좋고 잘 사는곳이 효도의 확장이며, 선비의 도덕적 책임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우리 후손들은 징사(徵士)의 가문으로서 도덕적 책무를 중히사는 가풍을 이어 나가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다."

라고 삼징사추모비 앞에 적혀 있었다.

화전고택(華田古宅)

최인영(崔仁永) 선생 생가(生家)

최인영 선생(1896~1951)의 자는 덕용,호는 화전으로 옻골 입향조 대암(臺巖) 최동집(崔東集) 선생의 12대손이며 대학자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 선생의 7대손으로 국채보상운동에 선도적 역활을 하신 칠호(漆滸) 최시교 선생의 손자로 태아났다.

천성이 순후하며 희생정신이 강하여 주위의 어려운 사정을 보면 그냥 넘어가지 않고 항상 구휼에 앞장서신 도덕군자이시다. 가난한 마을 사람들의 길흉대사에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도와주었고 매년 물이 부족하여 농사를 짓지 못하는 농민들을 위하여 사비(私費)를 들여 거대한 농엽용수지인 가산못 공사를 완성시켜 이 지역의 주민들이 걱정 없이 농사를 짓게 하였다. 이런한 선생의 덕행에 대하여 사람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화전고택은 당초 팔작지붕 형태로 정침5칸,아래채3칸,사랑채 5칸으로 건축하였으나 6.25이후 사랑채는 소실되었다.

2014년 정침과 아래채를 현재의 모습으로 개보수하여 장손인 최윤돈이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화전고택 대문

화전고택

옻골마을 전경

정려각 보인다.

최흥원정려각(崔興遠旌閭閣)

둔산동 옻골마을 중간에 위치한 이 건물은 조선 후기 영남의 대학자이자 효를 위한 덕목을 정하고 부모의 병을 극진히 돌보는 등 효행으로 유명하였던 백불암 최흥원을 기리기 위해 1789년 조정의 명으로 세원 것이다.

최흥원은 둔산동 옻골마을 입향조인 대암 최동집의 5대손으로 1705년에 태어나 82세를 사는 동안 평생 학문에 정진하면서 130여명의 많은 제자를 기르며 향약을 실시하는등 백성의 생활안정을 도모하는데 평생을 보냈다.

대산 이상정,남야 박손경과 더불어 영남삼로(嶺南三老)로 추앙을 받으며 당대 영남 퇴계 학맥을 이끌었다.

1734년에는 정조의 첫째 아들 문효세자의 익위사익찬이 되어 스승이 되었다.

정력각 안에 '효자,통정대부,승정원좌승.....익위사익찬최흥원지각'이라고 적혀 있는 현판이 보인다.

마을 구석구석 돌아본다.

금전고택(琴田古宅)

최종응 선생 생가

최종응 선생(1873~1943)의 자는 성문,호는 금전이고, 영남 삼로의 한 분이신 백불암 최흥원의 6대손으로 국채보상운동 대구 유림대표이신 최시교의 조카이시다. 선생은 192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책인 경북 선정사로 임명되었다.

1921년 2월 경북 칠곡군에서 사는 윤병돈 등로부터 군자금 3백만원을 받아 임정요원 이태운에게 전달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22년 3월 30일 대구 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의 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백불고택(百弗古宅)

대구 둔산동 경주최씨 종택

조선 인조 때의 학자 대암 최도집이 1616년 옻골에 정착하면서 그 이후에 지은 집으로, 대구에 있는 조선시대 주택 중 가장 오래되었다. 1730년에 지은 안채와 원래 백불암 최흥원을 추도하기 위해 설립한 동산서원이 1868년 훼철되면서 그 자재를 사용하여 다시 지은 사랑채,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어진 보본당과 포사, 그리고 불천위 사당인 벌묘와 가묘 등이 있다. 생활공간의 오른쪽에 있는 보본당은 1753년에 지었으며 보본당의 동쪽 담장 밖에 위치한 포사에서는 제사음식을 준비하였다고 한다. 보본당 뒤편에 있는 2동의 사당 중 벌묘는 최동집의 위패를, 가묘는 조선 정조 때의 학자인 최흥원의 위패와 종손의 4대 봉사위 위패를 모시고 있다. 살림채와 재실.사당등 많은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대구 둔산동 경주최씨 종택은 조선시대 양반주택과 그 생활양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백불고택

제사를 지내는 보본당

사당

고택 둘러보고 대암산으로 올라본다.

옻골재로 오르는 중 조선징사백불암최선생묘소 보여서 보고 간다.

조선징사백불암최선생묘도비

 


백불암최선생 묘소

묘비에는 '조선징사백불암최선생지묘' 라고 적혀 있다.

백불암최선생 묘소 들러보고 등로 복귀해서 올라간다.

산림욕장 지난다.

옻골재로 올라선다.

옻골재

능선따라 대암산 방향으로 올라간다.

짧은 암릉구간.

시원하게 조망이 열린다.

옻골마을

팔공산 관봉,환성산

환성산,낙타봉,초례봉

대암봉(465m)

팔공산

거북바위(생구암) 방향으로 내려간다.

옻골마을 당겨보고.

직진해서 거북바위 오른다. 오른쪽은 우회길.

거북바위 상단.

거북바위(생구암) 안내판

거북바위에서 바라본 옻골마을

 

 


거북바위에서 내려다본 산림욕장

등로따라 내려오면 체육시설 지난다.

능선따라 내려오다가 옻골마을로 내려간다.

비보숲,연못

 

주차장 도착 마무리하고 복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