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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문화재 탐방

영천 숭렬당(崇烈堂),배롱나무

by 우보72 2024. 7. 15.

 

영천 숭렬당(崇烈堂)

 
숭렬당은 세종 원년(1419) 쓰시마 정벌과 야인 토벌등에 혁혁한 공적을 남겨
일명 복장군(福將軍)이라 불리었던 명장 위양공 이순몽 장군이 평소 기거했던 집이다.
현재는 장군의 위패를 받들고 봄 가을로 제사를 드리고 있다.
 

 

 

숭렬당 앞 마당에 있는 숭렬공원 표석

 
 

 
이순몽의 본관은 영천(永川). 아버지는 영양군(永陽君) 이응(李膺)이며,
어머니는 전주최씨(全州崔氏)로 판서 최병례(崔丙禮)의 딸이다.
 
참고로 '영양'은 영천의 옛이름입니다.
 

 
1405년(태종 5) 음직(蔭職)으로 벼슬에 올라 1417년 무과에 급제, 1418년 의용위절제사(義勇衛節制使)·동지총제가 되었고 1419년(세종 1) 우군절제사에 임명되었다. 그 뒤 경상좌도병마절제사·중군도총제·좌군도총제·충청도병마도절제사·삼군도진무(三軍都鎭撫)·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등을 역임하였다.
 
 

 
1419년 우군절제사로 이종무(李從茂)·우박(禹博)·박초(朴礎) 등과 함께 대마도 정벌에 나섰다. 여러 장수들은 모두 패하였으나 이순몽은 김효성(金孝誠)과 함께 대전과를 거두어, 대마도주 도도웅이(都都熊耳)가 항복하고 수호를 요청하였다.
 
국사시간에 배운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로만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순몽 장군이 혁혁한 공을 세운걸로 보입니다.
 

 
1425년 진하사(陳賀使)로 중국에 들어가 선종(宣宗)이 즉위함을 축하하였다. 1433년 중군절제사가 되어 파저강(婆猪江)의 야인인 이만주(李滿住)를 토벌하여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오자, 세종은 노비와 의화(衣靴)를 내려주었고 총애가 극진하였다.
 
 

 
 

 
1434년 경상도도절제사, 1447년 영중추원사를 지냈다.
영천의 삼현사(三賢祠)와 숭렬당(崇烈堂)에 봉향되었다.
시호는 위양(威襄)이다.
 
 

 

숭렬당의 배롱나무꽃이 만발하기 시작했다.
(2024년 7월 7일)

 
 

 
고택의 담장과 어우러져 운치를 더해주었다.
 
 

 
 

 
 

 
위양공 이순몽의 신도비와 개선 송덕시비가 보이고
우측으로 포은 정몽주 선생의 자당인 영천이씨 추모비가 보인다.
 
 

 
'영중추원사
영천이공시(諡)위양휘(諱)순몽신도비'
 
 

 
'만고충신포은정몽주선생자당
변한국대부인영천이씨추모비'
 
 

 
중산문

 

 
관리하시는분이 계셔서 그런지,
문이 개방되어 있어 둘러보기 좋았다.
 

 

'숭렬당(崇烈堂)'

 
1433년 지어진 중국신 건물로 이순몽 장군이 기거했던 곳이고 보물 제521호로 지정되었다.
 
 

 
 

 
'숭렬당기'
 

 
'내삼문'
 

 
'위양사'
 
이순몽 장군의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위양사(威襄祠) 편액
 
 

 
 

 
 
 

 


 

 

 

-2024년 7월 7일 영천 숭렬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