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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문화재 탐방

안동 보백당종택(寶白堂宗宅)

by 우보72 2024. 6. 29.

 

 

안동김씨 보백당종택

 

종택은 가문의 맏이가 대대로 살아온 집을 가리킨다.

보백당 종택은
조선시대 문신 보백당 김계행의 종택이다.
 
종택은 풍산읍 상리마을에 있었으나,
후대에 모두 불타면서 근처의 고란리로 옮겼다가 1800년대 후반 현재의 위치로 자리잡게 되었다.
 
종택은 중심이 되는 집인 ㅁ자형의 정침, 사당,
사랑채인 보백당,그리고 대문채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전쟁으로 종택의 정침 일부가 불탔으나,
1958년 현재의 건물로 복원하였다.
 
 

 

보백당종택
(경북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 705)
 

 
 

 

김계행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취사(取斯),
호는 보백당(寶白堂)이다.
 
김득우(金得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혁(金革)이고,
아버지는 비안현감 김삼근(金三近)이며,
어머니는 김전(金腆)의 딸이다.
 

 

1447년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김종직(金宗直)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익혔다.
그 뒤 성주·충주의 향학교수를 지냈고
1480년(성종 1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제수되어 직언을 잘하였다.

 
 

 

보백당종택 대문채

 

이어서 고령현감이 되어 선정을 펴고
내직으로 옮겨 홍문관부수찬이 되었으며,
그 뒤 삼사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며 간쟁업무에 힘썼다.
 
1498년(연산군 4) 대사간에 올라
*권간(權奸)을 극론하였으나

훈구파에 의해 제지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으로 낙향하였다.
 
*권간:웃어른이나 임금에게 옳지 못하거나 잘못된 일을 고치도록 하는 말.

 
 

 

보백당종택 사랑채인 보백당
 
풍산사제(豊山笥堤) 위에 조그만 정자를 지어 ‘보백당(寶白堂)’이라 하고
학생을 모아 가르치니
보백선생(寶白先生)이라 불리었다.

 
김종직 등과 교유한 것으로 말미암아
무오사화·갑자사화에 연루되어 투옥되었으나
다행히 큰 화는 면하였다.

 

 
사당 삼문

 

1706년(숙종 32) 지방유생들이 덕망을 추모하여
안동에 묵계서원(默溪書院)을 짓고 향사하였다.
1859년(철종 10)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정헌(定獻)이다.
 
 

 

보백당종택 사당

 

 
 

 

마당 안으로 들어서면 종택의 중심이 되는
정침이 나오는데

'용계당'이라는 편액이 달려 있었다.
 
 

 

용계당(龍溪堂) 편액
 

 

 

한옥숙소체험을 운영하고 있어서,
정침 안쪽은 "숙박고객외 출입을 삼가해주세요!"
라는 문구가 보여서 안채 내부는 볼 수 없었다.

 

 

수령이 제법 되어보이는 베롱나무

 
 

 
 

 

보백당종택 정원
 

 

 

수령 200년의 상수리나무가
보백당종택 앞마당을 지키고 있었다.
 
 
 
 
 
 
 
-2024년 6월 16일 안동 보백당종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