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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문화재 탐방

(합천)부음정(浮飮亭),내암 정인홍(來庵 鄭仁弘)

by 우보72 2024. 7. 10.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

 

 

정인홍(鄭仁弘,1536~1623)선생의 자는 덕원(德遠),호는 내암(來庵),본관은 서산(瑞山)이다.

조선 중기 문인으로 남명 조식 선생의 수제자이다.

명종 13년(1588)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선조 5년(1572) 세 정승과 이조의 추천으로 황간 현감으로 제수되었다.

이듬해에는 최고의 목민관으로 보고되어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으며, 산림(山林) 장령이란 명성을 얻었다.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3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낙동강 연안 전선에서 왜군을 격파해 진주성을 회복하였고, 1593년 1월 성주성을 탈환하였다. 그 전공을 인정받아 영남의병도대장이 되었고, 정유재란 때에는 유일하게 기병(起兵)하여 명나라 장수들로부터 전란 중 최고의 수훈자로 평가받았다.

선조 35년(1602) 사헌부 대사헌에 제수되었다.

1604년에는 [남명집] 초간본인 갑진본(甲辰本)을 해인사에서 간행하였다.

 

선조 말년에는 광해군 양위 문제로 정쟁에 휘말려 귀양길에 올랐으나,

곧 이어 광해군의 등극으로 풀려나 한성부 판윤이 되었다.

이후 세자보양관.좌찬성.우촤선에 제수되었고,

광해군 4년(1612)부터 죽을 때까지 영의저엥 임명되어 있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한 차례도 나아가지 않았다.

 

인조반정(1623)이 일어나 '어머니를 폐위하고 동생을 죽인'

[폐모살제]원흉이라는 죄를 뒤집어쓰고 도성에 불려 올라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였다.

순종 2년(1908) 황제의 명령으로 죄명을 씻고 영의정 직책을 회복하였다.

 

시신은 문인 동계 정온 선생이 운구하여 상각사촌 선영에 매장하였고,

1924년 가야면 야천리 탑골 뒷산으로 이장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남산제일봉 들머리인 청량사로 가면서

가야면소재지 지나 부음정과 내암 기념관이 보여서 둘러보았다.

 

 

신도비

 

 

 

 

청람사(晴嵐祠)

 

정인홍 선생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

 

 

 

 

 

 

 

 

 

 

정맥고풍변(正脈高風辨)기념비

 

 

"『정맥고풍변(正脈高風辨)은 서령부원군 내암 정인홍(瑞寧府院君 來庵 鄭仁弘, 1536~1623) 선생이 71세 때인 1606년(선조39) 가을에 지었다. 내암의 정치철학과 추구한 가치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는 유려(流麗)한 명문(名文)이다. 400년 전 이귀(李貴) 등 집권 서인 세력들에 의해 비통하게 임종(臨終)한 내암 선생을 기억하고 추모하기 위해 가야산 해인사 고을에 정맥고풍변 기념비 건립은, 정의와 용기가 역사를 발전시킨다는 믿음을 확인하는 것이므로 의미가 크다.


내암은 “퇴계(退溪)가 정맥의 지위에 도달했는지 알지 못한다.”고 하면서, “실낱만큼이라도 이르지 못했는데, 한강(寒崗)이 퇴계를 정맥이라고 칭한다면 아부한 것이거나, 분수를 모르고 인륜을 저버린 것이다. 사람을 논(論)하려면 그 사람의 욕망이 다한 곳을 보라고 했다.” 계해정변(癸亥政變, 1623년)으로 ‘임금 광해가 오랑캐 청나라와 화친했다.’는 주요 이유로 폐위된 뒤, 퇴계 문인들을 비롯한 서인(西人, 노론) 세력과 사이비 남명학파 후예들까지 이긴 자들 편에서 정맥고풍변과 함께 맥락이 같은 신해상차(辛亥上箚, 소위 회퇴변척소)를 먹잇감으로 삼아 족보 문집 묘갈명 등에서 내암을 난도질했다.


250년 뒤 매천 황현(梅泉 黃玹)은 “오늘날 유자(儒者)라는 자들은 지금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 예기치 않은 변고(變故)를 만나자 아첨이나 하고 납작 엎드려 있을 뿐 임진왜란 때 도적들에게 항거하며 의병을 일으켰던 정인홍의 발뒤꿈치도 따라가지 못한다. 대대로 세도를 누린 집안에서 심성(心性)을 말하고, 이기(理氣) 분석에 치중하는 학문(學文, 성리학)은 과연 무엇을 귀하게 여기자는 것인가.”라고 한탄했다. 뒤이어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는 내암을 을지문덕 이순신 최영과 함께 ‘4대 영웅’으로 평가했다. 정맥고풍변 재탄생은 긴 세월 왜곡 폄훼와 서러움을 딛고 내암 선생이 역사의 진실 속으로 웅비하는 것이기에 참으로 뜻깊다.


내암은 1908년(순종1) 4월 한효순 윤휴 목내선 이현일 최석항 김일경 이광좌 등과 신원(伸冤)까지 됐지만, 아직도 내암에게 덧씌우진 가짜 뉴스를 진실인양 믿으며 내암을 이단시(異端視)하고 있다.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의 고제(高弟)인 내암을 덕천서원에 배향하지 못하고 있는 비루한 현실이지만, 이번 정맥고풍변 기념비 건립으로 내암 선생은 역사의 진실 속으로 우리 곁에 다가왔다고 자평했다."

 

 

 

역사는 승자들의 기록이라는걸 다시 한번 느낀다.

 

 

 

 

 

 

내암기념관에서 바라 본 매화산(좌)과 남산제일봉(우)

 

 

 

 

 

부음정은 내암기념관 바로 밑에 위치한다.

 

 

부음정(浮飮亭)

 

부음정은 선생이 학문에 정진하고 후학을 길러낸 곳이다.

45세(선조13년,1580)때 가야산 황산리(현 가야시장 주변)에 처음 세웠으며,

현재의 건물은 해방 이후 이건된 것으로 전해진다.

 

부음(浮飮)은

"上九, 有孚于飮酒, 无咎, 濡其首, 有孚, 失是"

상구는 믿음을 두고 술을 마시면 허물이 없지만,

머리를 적시듯 지나치면 유부(有浮)에 옮음을 읽으리라.

 

라는 구절에서 인용한 말이다.

 

 

 

 

 

부음정기(浮飮亭記)

 

 

 

부음정기에 대한  한글 설명도 되어 있어서 참 좋았다.

 

 

 

 

 

 

"삼우정(三友亭"

 

 

 

 

 

 

 

 

 

 

 

 

 

-2024년 6월 1일 내암기념관,부음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