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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문화재 탐방

성주 회연서원(檜淵書院),한강(寒岡) 정구(鄭逑)

by 우보72 2024. 7. 11.

 

회연서원(檜淵書院)

 

회연서원은 인조 5년(1627)에 유림들이 한강 정구(寒岡 鄭逑)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회연초당이 있던 자리에 회연서원을 세웠으며, 숙종 16년(1690)에 왕으로부터 '회연'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렸다가, 1974년에 복원되었다.

 

회연서원에는 교육 공간인 강당, 정구의 위패를 모신 사당,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전사청, 유물을 전시한 숭모각, 지역 선대 유학자의 위패를 모신 향현사 등이 있다.

 

정구 선생이 직접 조성한 앞뜰인 백매원에는 신도비가 있다.

 

 

 

 

 

경북 성주군 수륜면 신정리 256-1

 

 

 

현도루(見道樓)

 

현도루는 학문의 길 즉 도(道)를 알현한다는 뜻으로

見자를 볼견으로 읽지 않고 뵐현으로 읽는다.

 

 

 

한강 정구 선생이 직접 조성했다는 '백매원'

 

 

 

 

小小山前小小家  
滿園梅菊逐年加 

   更敎雲水粧如畵    
擧世生涯我最奢  
  - 정구, '회연초당', <한강집(寒岡集)>

 

 

자그마한 산 앞에  자그마한 집 하나

뜰 가득 매화 국화 해마다 늘고

물과 구름 있으니 그림이어라

 뉘 있어 나만큼 사치로울꼬 

 

 

 

 

 

 

한강 정구는 조선시대 학자이며 문신으로,

외증조 한휜당 김굉필의 도학을 전수하고 그 기반 위에 퇴계학과 남명학을 통합하여

새로운 학통을 세웠으며 실학의 연원을 확립하였다.

공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고,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 되었다.

 

 

 

 

정구의 자는 도가(道可),호는 한강(寒岡),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본관은 청주, 출신은 성주이다.

아버지 사중(思中)이 성주 이씨와 혼인하여 성주에 정착했다.

1543년 성주의 사월리(유촌)에서

아버지 사중과 어머니 성주 이씨 사이에서 3남 1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향현사"

 

지역 선대 유학자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한강 정구 신도비"도 보인다.

 

 

 

 

 

수령 400년의 느티나무가 회연서원 앞마당을 지키고 있다.

 

 

 

한강 정구는 조선 중엽 이후 성주가 낳은 대표 인물로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1540~1603)과 함께 성주의 '양강(兩岡)'이라 불린다.

세 살 차이인 동강과 한강이 태어난 곳은 성주군 10개 읍면 중

이들처럼 큰 인물이 많이 태어난 곳이라 하여 '대가(大家)'란 이름이 붙은 고을, 대가면이다. 

양강은 대읍(大邑) 성주에 공존한 퇴계학파와 남명학파의 사상을 대표하는 큰 학자다.

양강은 성주향교에서 덕계(德溪) 오건(吳健, 1521~1574)의 문하에서 공부했으며

뒤에 퇴계와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삶은 각각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동강은 출사(出仕)하여 오래 관직 생활을 했고,

한강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는 삶을 택했다.

한강이 많은 제자와 저술을 남긴 것은 그 선택의 결과였다. 

외증조부인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의 학풍을 계승한 한강은

성리학뿐 아니라 병학, 역사 등 여러 분야에 관심을 두었다고 한다.

 

 

 

회연서원의 강학공간인 경회당

 

 

 

해서로 쓰여진 회연서원 편액은

숙종의 어필이라고도 하고 한석봉이 썼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망운암,경회당,옥설헌

 

'옥설헌'

 

회연초당 당시 이름으로 

겨울에 눈발이 날리 듯 매화가 흩날리는 풍경을 의미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망운암'

 

망운암 편액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대학자인 미수 허목의 글씨로

구름을 바라보며 멀리서 부모를 그리워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허목의 글씨가 이곳에 있는 것은

거창 현감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와 정구의 제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동재(명의재)

 

 

서재(지경재)

 

 

 

 

 

 

 

 

"한강 정구 신도비"

 

'한강 정구 신도비'는 조선 중기 대표적 성리학자인 한 사람인 한강 정구의 신도비이다.

비석은 1633년(인조 11) 청주정씨 집성촌인 수성리 갓말마을 뒤 창평산에 조성된 한강 정구 묘소 부근에 세워졌다가 분묘를 성주읍 금산리의 인현산으로 이장하게 되면서 1668년(현종 3) 현재 위치인 회연서원 경내로 옮겨 세워졌다. 신도비는 비신,이수,귀부가 완전하게 잘 남아 있다. 이수에는 쌍룡문과 여의두문이 깊이 새겨져 있고, 귀부는 귀갑문이 양각으로 얕게 새겨져있다. 비신의 전면 상단에 전서(篆書) '문목공한강정선생신도비명'이라 새겨져 있다.

 

 

 

 

 

 

 

 

-2024년 6월 1일 회연서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