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란서원( 觀瀾書院)
관란 서원은 조선 중기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데 중요한 역활을 한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자 효종 10년(1659)에 지방 유림들이 세운 서운이다. 고종 5년(1868)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서원이 헐렸으나, 1901년에 지금의 자리에 다시 지어졌다.
관란서원에는 학문을 연구하는 곳인 강당과 제사를 지내는 사당인 안인사(安仁祠)가 있다. 현재 안인사에는 회재 이언적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매년 음력 9월 9일에 제사를 지낸다.
관란서원은 1659년(효종 10) 이승증의 유허지에 건립되었다. 경상북도 경주 출신의 이승증은 만년에 경주의 속현(屬縣)이었던 자인현(慈仁縣)에 삼회당(三會堂)과 어초와(漁樵窩)를 지었으며, 인근에 맹구대(盟鷗臺)와 관란대(觀瀾臺)를 축조하였다. 이승증은 이곳에서 자신을 찾아 온 수백 명에 이르는 선비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에 자인 지역 사림들이 이승증을 기리고자 별업(別業)에 원우(院宇)를 짓고자 하였다. 그러나 1653년(효종 4) 자인현이 경주부에서 이탈하여 복현(復縣)됨에 따라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대신 1659년에 이승증의 호를 딴 관란서원(觀瀾書院)을 짓고, 1660년에 이언적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이승증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희로(希魯)·백순(伯純), 호는 관란(觀瀾)이다. 경상북도 경주 출신으로 1558년(명종 13)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여러 관직에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만년에는 자인현(慈仁縣)에 은둔하였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으며, 격문을 돌려 창의를 격려하기도 하였다.
문은 닫혀 있지만 좌,우로 담장이 개방되어 있어 둘러볼수 있었다.
'문원공회재선생단비'
이언적의 본관은 여강(驪江)이고, 초명은 적(迪),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경상북도 경주 출신으로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관직은 좌찬성(左贊成)에 올랐다. 1610년(광해군 2) 문묘(文廟)에 종사되었고, 경주의 옥산서원(玉山書院) 등에 제향되어 있다. 우리나라 성리학 정립에 있어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관란서원사우건립기'
'안인사'
회재 이언적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관란서원'
'관란서원' 현판은 1923년에 후학 윤현기가 썻다고 한다.
'관란서당기'
-2024년 7월 6일 관란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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