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유리에서 대창쪽으로 넘어가다보면
광주 이씨 시조인 판서공 이당 묘역이 보인다.
광주이씨(廣州李氏)
경기도 광주시(廣州市)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는 신라 내물왕 시절에 내사령을 지냈다고 전해지는 이자성(李自成)이며 중시조는 고려 말에 국자감 생원시에 합격하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를 지낸 이당(李唐)이다. 그러나 광주이씨 계파 간에 시조에 대한 의견이 다른데, 석탄공파(石灘公派), 암탄공파, 율정공파는 이자성(李自成)을 시조로 하고 있다. 광주이씨 대동보에는 이당 이전의 계보도 소개되어 있다.
광주 이씨의 광주는 경기도 광주시(廣州市)이고, 광주광역시를 본으로 하는 이씨는 광산 이씨(光山 李氏)다.
광주이씨족보서는 그 조상들이 남북국시대(발해,신라시대) 신라의 칠원성(현 경남 함안군 칠원읍)을 근거지로 삼았던 호족이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자성을 시조로 하여 내려온 칠원성은 신라의 모든 성이 고려 왕건에게 항복한 뒤에도 마의태자만을 왕으로 섬길 뿐 왕건에게는 굽힐 수 없다 하여 끝까지 항거하였으므로 크게 노한 왕건이 대군을 이끌고 친히 성을 함락시킨 뒤 칠원성에서 이씨성을 가진 일족들을 모두 체포하여 회안(현 경기도 광주시 경안동)지방 관헌들에게 노비로 삼도록 하였다.
이후 여러 세대에 걸쳐 광주의 노비들 중에서 이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대대로 재주 있고 덕망 높다고 주위에 알려지면서 이를 동정한 관리들이 그들의 신분을 높여주어 고려 말경에 이르러서는 더러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는 사람들도 생기게 되었다. 이들 중에 이당(唐)이 고을 수령의 아전을 살고 있었는데 그 수령의 딸과 혼인을 맺어 그들 사이에서 대대로 재주 있고 덕망 높은 자손들이 번창하니, 한음 이덕형을 비롯하여 광주 이씨의 주류를 이루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당의 후손들이다.
이당의 다섯 아들 이인령, 이원령(이집), 이희령, 이자령, 이천령이 다같이 과거에 급제하였고, 아전의 자식으로 오형제가 전부 과거에 급제한 사실은 온 나라 사람들에게 소문이 널리 퍼지면서 모두가 부러워하였다. 다섯 아들 중 둘째가 유명한 둔촌(遁村) 이집(李集, 1327~1387)으로 고려 말인 1355년 문과에 급제하면서 정몽주(鄭夢周) 등과 함께 높은 학문으로 이름을 날렸고, 그의 집이 있던 고을은 그의 이름을 따서 오늘날 서울의 둔촌동이 되었다. 둔촌동에는 지금까지도 그가 살던 유적지와 그와 관련된 전설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광주 이씨의 조상 중에서 오늘날 기록이 확실히 남아있는 사람이 한음의 8대조 되는 위의 둔촌 이집이므로 대부분의 광주 이씨들은 이당(李唐)을 시조로 하고 둔촌을 광주 이씨의 제1대로 기록하고 있다.
처음에는 본관을 회안으로 칭관하다가, 940년 지명이 광주로 개칭됨에 따라 광주를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광주이씨 시조 이당 묘'
광주 이씨 시조 이당의 묘는 야자형(也字形)으로 조선 8대 명당으로 불리며,
왕릉처럼 커서 광릉이라 한다.
' 광주이씨시조고려생원 본조증 자헌대부이조판서휘당지묘'
'광주이씨 시조 고려생원 본 조증이조판서휘당지묘(廣州李氏始祖高麗生員本朝贈吏曹判書諱唐之墓)'
'고려숙부인 영천이씨지묘'
광주이씨 시조 묘에 영천최씨 최원도의 모친이신 영천이씨 묘가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광주이씨 시조 이당의 묘는 영천최씨 문중 선산에 있는데 그 이유는 신돈의 미움을 사 생명의 위협을 받은 둔촌 이집(李集)이 연로하신 아버지를 등에 업고 최원도(崔元道)의 집을 찾아갔으나 어렵게 찾아간 친구의 집에서는 반갑게 맞아주기는 커녕 매몰차게 대하며 역적이 앉은 자리라며 부자가 앉아있던 자리를 불태워버리라 지시했다.
이집은 "이 친구가 이럴 친구가 아닌데 분명 다른 생각이 있겠지" 라 생각하고 날이 어두워질때를 기다리니 마침내 최원도가 이집과 그의 아버지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서 다락방에 숨겨준다. 몇년 후 둔촌선생의 아버지 이당이 사망하자 자신이 입을 수의를 내어주고 어머니 묘(영천 이씨) 근처에 매장하였다.
여기서 천곡 최원도의 집에는 제비라는 여종이 있었는데 음식을 많이 드시는 주인어른이 아닌데 어느날부터 많은 양의 음식을 내오라 하였고 이를 수상하게 여긴 제비가 문틈 사이로 방을 엿보니 주인어른과 낯선 남자들이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을 보고 최원도의 부인에게 말하게 된다. 이 일을 심상치 않게 생각한 부인은 혀를 깨물어 벙어리가 되고 여종은 주인가문의 멸문지화를 막기 위해 자결하였다.
그리하여 광주이씨와 영천최씨의 제사지내는 날에는 여종 제비의 제사도 함께 지낸다고 한다. 제비의 무덤은 영천최씨 문중 선산에 자리잡고 있으며 비석에는 연아총(燕娥塚)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러한 일로 광주이씨(廣州李氏)와 영천최씨(永川崔氏)의 후손들 간에는 그들의 조상인 이집(李集)과 최원도(崔元道) 사이의 우의를 상고하면서 양가가 같은 날 묘제를 지내며 서로 상대방의 조상 묘에 잔을 올리고 참배하는 아름다운 풍습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고 한다.
일대 묘역은 현재 영천최씨에서 광주이씨로 소유가 바뀌어 있다고 한다.
사룡산과 밑으로는 재실이 보인다.
'둔촌(遁村)에게 드리다.'
재실
'둔촌선생유적비'
둔촌선생유적비 앞에 배롱나무가 이쁘게 피어 있었다.
-2024년 7월 7일 광주이씨 시조 이당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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