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가운데 오늘은 경주쪽 한바퀴 돌아봅니다.
먼저 신라 말의 대문장가인 고운 최치원이 시무십조를 쓴 곳이기도 한 상서장(上書莊)을 찾아보았습니다.
예전 국사시간에 들었던 기억이 있는 최치원의 시무십조(時務十條)는 최치원이 진성여왕에계 건의한 정책이라고 하죠.
그 내용은 전해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경주 상서장
상서장주차장에 주차하고 둘러봅니다.
주차장 넓직하고 좋더군요.
주차장 좌측편에 '문창후최선생유허비'가 보입니다.
문창후최선생유허비
문창후 최치원 선생에 대해서 간단히 알아보면...
최치원은 통일신라 말의 문인이자 관료,학자로 본관은 경주,자는 고운, 경주 사랑부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불선(儒佛仙) 삼교를 포용해 수용한 사상가이자 훌룡한 목민관이기도 했다.
일찍이 중국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 18세에 진사시에 급제, 881년 '토황소격문'을 지어 당나라 전역에 문명을 떨쳤다.
또한 현존하는 개인문집인 '계원필경'을 지었다.
24세에 태산군(정읍 태인) 태수로 임명되었고, 38세에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여조'를 올려 개혁안을 제시했으나 시행되지 못했다. 42세에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은둔 생활을 하다가 여생을 마쳤다고 전한다.
범해(泛海)...바다에 떠 있으며
돛 달아 푸른 바다에 배 띄우니
긴 바람은 만리에 통하네.
뗏목 탄 한나라 사신 생각나고
약 캐는 진나라 아이 기억나네.
하늘 너머 바깥에 해와 달이고
하늘과 땅은 태극 안에 있네.
봉래산이 지척에 보이니
나도 이제 신선을 찾으려 하네.
2013년 6월 우리나라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 했을때 시진핑이 환영사에서 최치원 선생의 '범해'의 싯구를 인용해서 말문을 열었다는 일화가 있네요.
상서장 문화재 표석
상서장 추모문
문창후최선생상서장비
상서장 풍경
베롱나무 꽃 피면 이쁘겠군요.
추모문(追慕門)
상서장(上書莊)
상서장은 신라 말의 문신이자 대문장가인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시무십조를 쓴 곳이다.
최치원은 그가 12세 디던 해인 경문왕 8년(868)에 중국 당나라에 유학하여,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헌강왕 11년(885)에는 귀국하여 어지러운 국정을 바로잡고자 애썼다. 특히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조을 올린 것으로 유명하다.
후에는 벼슬을 버리고 가야산, 지리산 등 명산을 찾아 자연과 벗 삼아 지내다가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다. 고려 현종 때 문창후(文昌侯)에 추봉되고, 공자묘에 배향하도록 했다. 이때 최치원이 머물며 공부하던 이곳을 임금에게 글을 올린 집이라는 뜻에서 상서장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현재 이곳에는 상서장과, 영정각, 추모문 등이 있고 조선 고종 때 건립한 비가 남아 있다.
최치원의 영정을 봉안하고 매년 4월에 제사를 지낸다고 합니다.
상서장(上書莊) 현판
숭보당(崇報堂) 현판
영정각(影幀閣)
최치원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는 곳입니다.
문은 잠겨 있어 안은 볼 수 없었네요.
4월 제사 지낼 때는 볼수 있을 듯 합니다.
영정각 현판
상서장 둘러보고 주차장 좌측에 있는 고운대(孤雲臺)도 찾아봅니다.
고운대(孤雲臺)
"고운 최치원이 머무렀던 곳으로, 위에 상서장이 있고 아래에는 문천이 흐르며 월성이 휜히 내려다보인다.
선생은 임금에게 시무십조을 올리고 이곳에 올라 기다렸으나 끝내 나라의 부름을 받지 못하자 표연히 신라를 떠났다. 후세 사람들이 이곳을 '고운대'라 하고 그의 충정을 기렸다."
라고 안내판에 적혀 있습니다.
상서장,고운대 잘 둘러보고 다음 목적지로 이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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