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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문화재 탐방

안강 옥산서원(玉山書院),문원공 회재 이언적

by 우보72 2024. 5. 23.

 

옥산서원 이팝나무(2024년 4월 28일)

 

 

 

 

문원공(文元公)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경상북도 경주 출신. 본관은 여강(驪江: 여주(驪州)).

초명은 이적(李迪)이었으나 중종의 명으로 언(彦)자를 더하였다.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 · 자계옹(紫溪翁).

회재라는 호는 회암(晦菴: 주희의 호)의 학문을 따른다는 견해를 보여준 것이다.

할아버지는 참군 이수회(李壽會)이고, 아버지는 생원 이번(李蕃)이며,

어머니는 경주손씨(慶州孫氏)로 계천군(鷄川君) 손소(孫昭)의 딸이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인물로서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주희(朱熹)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여 이황에게 전해주었다.

 

 

주희는 중국 송나라의 유학자(1130~1200)

자는 원회(元晦)ㆍ중회(仲晦).

호는 회암(晦庵)ㆍ회옹(晦翁)ㆍ운곡산인(雲谷山人)ㆍ둔옹(遯翁).

도학(道學)과 이학(理學)을 합친 이른바 송학(宋學)을 집대성하였다.

‘주자’라고 높여 이르며, 학문을 주자학이라고 한다. 

 

 

1514년(중종 9)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정랑 · 사헌부장령 · 밀양부사를 거쳐 1530년 사간이 되었다.

이때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경주의 자옥산에 들어가서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1537년 김안로 일당이 몰락하자 종부시첨정으로 불려나와 홍문관교리 · 응교 · 직제학이 되었고,

전주부윤에 나가 선정을 베풀어 송덕비가 세워졌다.

이때 조정에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를 올려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이조 · 예조 · 형조의 판서를 거쳐 1545년(명종 즉위년) 좌찬성이 되었다.

이때 윤원형(尹元衡)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선비들을 심문하는 추관(推官)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1547년(명종 2) 윤원형 일당이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고,

그 곳에서 많은 저술을 남긴 후 세상을 떠났다.

 

이언적은 사화가 거듭되는 사림의 시련기에 살았던 선비로서,

을사사화 때는 좌찬성 · 판의금부사의 중요한 직책으로 사림과 권력층 간신 사이에서

억울한 사림의 희생을 막으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사화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후에 이이는 이언적이 을사사화에 곧은 말로 항거하며 절개를 지키지 못했다고 비판하였으나,

오히려 이언적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온건한 해결책을 추구하였던 인물이다.

 

이언적은 1517년 영남지방의 선배학자인 손숙돈(孫叔暾)과 조한보(曺漢輔) 사이에 토론되었던

성리학의 기본쟁점인 무극태극논쟁(無極太極論爭)에 뛰어들었고,

주희의 주리론적 견해를 바탕으로 두 학자의 견해를 모두 비판하여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밝혔다.

 

이언적이 벌인 태극의 개념에 관한 논쟁은 조선조 성리학사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개념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언적은 이 논쟁에서 이기론(理氣論)의 주리론적 견해로서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相雜說)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이우위설(理優位說)은 이황(李滉)에게로 계승되는 영남학파의 성리설에 선구가 되었다.

 

 

1569년(선조 2) 종묘(宗廟)의 명종(明宗)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1610년(광해군 2) 문묘에 종사되었고,

경주의 옥산서원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옥산서원 가는길

 

 

 

 

 

 

 

옥산서원 하마비(下馬碑)

 

하마비는 이 비 앞을 지나갈 때에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말에서 내리라는 뜻이죠.

궁궐이나 서원,향교,사당의 입구에 세워졌으며, 경의를 표하는 뜻으로 말에서 내려 지나가도록 하였다.

 

 

 

 

 

 

 

세심대(洗心臺)

 

세심대는 옥산서원 앞으로 흐르는 자계천 가운데에 자리한 너럭바위 일대를 말한다.

자계천을 흐르는 물은 세심대에서 떨어져 내려 작은 폭포와 용소를 만들어 빼어난 경치를 이룬다.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성리학자인 회재 이언적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독락당을 지어 머물면서 주변의 산과 계곡에 이름을 붙였는데

이를 '사산오대'라고 하며 , 그중 하나가 세심대이다.

 

세심대는 마음을 씻고 자연을 벗 삼아 학문을 구하는 곳이라는 뜻이며,

바위에 새겨진 글씨는 퇴계 이황이 쓴 것이다.

 

 

사산오대(四山五臺)

 

이언적은 독락당과 계정 주변에 있던 자연에 사산오대라는 이름을 붙이고 자신의 정원으로 삼았다.

사산(四山)은 화개산(동),자옥산(서),무학산(남),도덕산(북)을 가리킨다.

오대(五臺)는 세심대,관어대,탁영대,영귀대,징심대를 말한다.

 

독락당 계정을 떠 받치고 있는 반석이

'물고기가 노니는 것을 바라보는 곳'이라는 뜻에서 관어대이고,

계정 맞은편에 병풍처럼 두른 바위가 영귀대이다.

계정 북쪽에 작은 폭포가 이루어 '갓끈을 씻는 곳'이라는 뜻에서 탁영대이고,

탁영대 북쪽 일대를 징심대라 하였다.

그리고 옥산서원 밖 너럭바위를 세심대라 하였다.

 

 

 

옥산서원 외삼문 역락문(亦樂門)

 

 

 

 

옥산서원 강학 영역은 학문을 연국하는 공간으로 무변루,구인당,민구재,암수재 등의 건물로 이뤄져 있다.

 

 

 

 

무변루(無邊樓)

 

유생들의 휴식 공간인 무변루는 '끝이 없는 누각' 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편액의 글씨는 석봉 한호(한석봉)의 글씨이다.

 

 

무변루 옆 향나무

 

 

무변루 안쪽 모습

 

 

무변루 편액

 

 

옥산서원 강당 구인당(求仁堂)

 

무변루를 마주 보고 있는 강당인 구인당은 이언적이 쓴 '구인록'에서 이름을 따왔는데,

이 현판도 석봉 한호가 썻다.

이 곳은 강의와 토론이 열렸던 곳으로, 서원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옥산서원 편액

 

 

 

 

 

 

구인당 편액

 

 

해립재(偕立齋)

 

 

양진재(兩進齋)

 

강당 마루 양쪽의 양진재와 해립재는

교수와 유사(有司)들이 기거하던 곳으로 현대 학교의 교무실에 해당한다.

 

 

 

동재인 민구재(敏求齋)

 

 

서재인 암수재(闇修齋)

 

강당의 앞마당 좌우에는 유생들이 학문을 닦으며 기거하던 동재와 서재가 마주보고 있는데,

유생들 간에도 위계가 있어 나이가 많은 유생들이 동재에 기거하였다.

 

 

 

 

옥산서원 제향 영역은 제사를 지내는 공간과 이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체인문,체인묘,전사청,경각,비각등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내삼문인 체인문(體仁門)

 

 

 

체인묘(體仁廟)

 

회재 이언적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경각(經閣)

 

경각에는 어서,어필,내사본,퇴계수필,각종 전적 등을 봉안하고 있다.

 

 

이언적 신도비각

 

 

 

이언적 신도비

 

신도비의 비문은 고봉 기대승이 짓고, 글씨는 아계 이산해가 썼다.

건립 당시에는 이 서원 앞의 계곡에 있었으나 훼손을 막으려고 서원 안으로 옮겼다.

 

 

 

문화재 표석

 

 

 

 

 

 

 

자옥산,도덕산 산행 후 다시 들러 옥산서원 이팝나무 구경하고 복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