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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문화재 탐방

애국지사 매운 이정희 선생 추모공원,임란창의 고성 이씨 청도 오의사 숭모단

by 우보72 2024. 7. 3.

 
 

 

유등연지 둘러보고 도로 건너편에 있는
애국지사 이정희 선생 추모공원 들러봤습니다.
 
 
 
 

 

애국지사 매운 이정희 추모공원

 
 
 

 
 

 

애국지사 매운 이정희 선생 추모비와 흉상

 
 
매운(梅雲) 이정희(李庭禧) 선생
 
이정희 선생의 자는 내길이요 호는 매운,
본관은 고성이다.
 
선생은 일제강점기 비밀결사 조선국권회복단, 대한광복회 등에 참여하여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1915년 비밀결사 단체인
조선국권회복단 조직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조선광복회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3·1운동 이후에는
고향 청도에서 온명학교를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바로 옆에 임란창의 고성이씨 청도 오의사 숭모단이 보입니다.

 

 

임란창의 고성 이씨 청도 오의사 숭모단

 
 
숭모단에 있는 비문 내용 중 일부입니다.
 
서기 1592년 임진년 4월 14일, 헤아릴 수 없는 왜군들이 부산포에 갑자기 들이 닥쳤다.

"명나라로 들어갈 길을 빌려 달라"라는 구실을 앞세워 우리나라를 침입한 것이다.
이것이 7년 전쟁, 임진왜란의 시작이며 우리나라는 태평의 무방시 상태에서 기습을 당한 것이다.
 
목숨을 걸고 항전하던 동래부사 송상현은 순국하고 왜군들은 삼랑진에서는 큰 저항을 받았다.
밀양부사 박진은 힘을 다해 싸웠으나
중과부족으로 밀렸다.
왜군은 파죽지세로 4월 20일, 상륙한지 7일 만에 청도가 함락되었다.
 
고요하던 협촌에
하늘이 깨지는 듯한 조총소리를 듣고
군수마저 혼비백산하여
관졸들을 데리고 최정산으로 사라졌다.

백성들은 우왕좌왕하며 산과 계곡으로 도망치는
참담한 지경에 이르렀다.
 
왜군은 의기충천하여 굶주린 이리떼처럼
이르는 곳마다산야 촌락을 불 지르고
살육을 자행, 생지옥을 방불케 하였다.
 
이에 비분강개한 고성이씨 일분 5의사가
분기하여 책을 접고 
결연히 구국성전에 몸을 던졌다.
 
의병을 일으킨 5의사는
이경(李磬),이해(李海),이잠(李潛),
이렴(李濂),이철(李澈)

이다.
 
 

 
 

 
 
 

 
 
 

 

의마총(義馬塚) 유래비

 
 

 

이곳에서 동북방향으로 약 450미터 거리의 산에
오의사중 한명인 이해 의사(李海 義士)가 아끼고 사랑하던 말의 무덤인 '의마총'이 있다.
 
이 말은 임진왜란(1592년)이 일어나자 홍의(곽재우)장군 휘하의 의병장인 이해 의사를 태우고
창녕 화왕산성전투에서 왜군을 무찌르는데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온 의로운 말,
즉 의마(義馬)이다.
 
그후 정유재란(1597년)때는
권율 장군의 '출사청유서'를 받은 이해 의사를 태우고
재차 침략해 온 왜군을 쳐부수기 위해
남원성으로 달려갔다.

남원성을 집중 공격하는 왜군에 맞서
1만명의 관군과 의병이 목숨을 걸고 저항했지만
5만6천명의 왜적을 감당치 못하고 비참이 죽어갔다.

죽음 앞에 선 이해 의사는 사태가 위급함을 알고
고향에 있는 아들 환(瓛)에게 절명사(絶命詞)를써서
생사를같이 했던 말의 안장 밑에 넣어
홀로 집으로 떠나 보냈다.
 
전북  남원에서 이곳 청도 고향집까지
수백리 길을 달려
이해 의사의 전사를 알린 말은 지쳐 쓰러졌다.
 
이번에도 이해 의사와 말이 살아오길
빌며 기다렸던 가족들은
눈물로 이해 의사의 전사를 알고
시신없이 초혼장으로 마을 산 치산에 장례를 치르니
말 또한 먹이를 거부하고 울기만 하다가
며칠을 넘기지 못하고 주인을 따라 죽으니
같은 산 동쪽 끝자락에 묻어
의마총(義馬塚)이라 새긴 조그만 돌을 세워
해마다 벌초를 해 온 것이 어언 400여 년이 넘었다. 
 
이 말은 이해 의사와 함께 전투에 참가해
나라를 지켰던 구국마(求國馬)였고,
먼길을 달려 유서를 전한
충마(忠馬)요 의마(義馬)였다.

 

 
 

 
 좌측으로 고성 이씨 가문의
망헌 이주 선생 시비와 묘역도 보였다.

 

망헌 이주선생 시비(忘軒 李冑先生 詩碑)

 
 삐걱거리는 노 멈추고 평생을 서러워하니 / 강정명로통평생(强停鳴櫓痛平生)  
햇빛도 밝게밝게 우리 형제 비추어 주네 / 백일소소조제형(白日昭昭照弟兄)   
만약 정위 새가 날아와 바다를 메워준다면 / 약교정위능전해(若敎精衛能塡海)   
한 덩이 탐라도를 걸어서 가련만 / 일괴탐라가보행(一塊耽羅可步行)   
 

망헌(忘軒) 이주(李胄, 1468년~1504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시인이다.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주지(胄之), 호는 망헌(忘軒). 좌의정 이원(李原)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현감 이평(李泙)이며,
어머니는 허추(許樞)의 딸이다. 

그는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였다.
 

 

 

 

 
 

 

망헌선생철성이공지단
 
고성 이씨는 철성 이씨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경남 고성의 옛 지명이
철성이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철성이씨(鐵城李氏)
시조 이황(李璜)은 중국 한무제 때

군사를 이끌고 우리나라에 왔다가
눌러앉은 이반(李槃)의 24세손이다.

고려 덕종 초에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부사를 지내고
1033년 거란의 침입을 막아
철령군(鐵嶺君)[철령은 철성(鐵城)의 옛 이름으로, 현 경상남도 고성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이황을 시조로 하고
철성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었다.

 
 
 

 

홍문관수찬철성이공지단
 

 수찬은 경연을 담당하며 왕의 자문(諮問)에 응하고, 궁중의 경서(經書)와 사적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홍살문 밑으로 유등지와  고성이씨 군자정이 보인다.
 
 
 
 
 
 
 
-2024년 6월 30일 애국지사 매운 이정희 선생 추모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