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전에 청천서원 방문했을 때 놓치고 왔던
독립운동가 김창숙 선생 생가와 청천서당 들러보길 위해 성주 대가면 칠봉마을을 다시 찾아봤습니다.
방문일시: 2024년 7월 13일
마을 어귀에 보이는 칠봉 마을 소개
'칠봉마을'
이 마을은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로 통일신라 이래 사월(沙月)이라 불렸다.
사월은 마을 앞을 흐르는 사천(沙川)과 마을 산인 월명봉(月明峰)에서 각 한 글자씩 따서
'사월'이라 한 것이다.
조선시대 김우옹의 후손들이
그가 항상 도덕과 윤리를 사모한다 하여
사월마을을 사도실(思道室)이라 개칭하였다.
이후 이 마을은 사월 혹은 사도실이라 불린다.
이 마을에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이 3명이 출생하였는데
동강 김우옹(1540~1603),한강 정구(1543~1620)(유촌마을 출생),심산 김창숙(1879~1962)이다.
김우옹과 정구는 조선시대의 성리학자이며 통상 성주권의 양강(兩岡:東岡,寒岡)으로서
정치적,학문적으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김창숙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동강대(東岡臺)'
동강대에서 바라본 사도실 마을
동강대에서 바라 본 '청천서원'
동강 김우옹 선생을 모시고 있는 서원입니다.
https://gopeak.tistory.com/579
청천서원에 대한 설명은 앞전 포스팅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동강대 밑에 흐르는 '사천(沙川)'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 생가'
'심산고택'이라는 현판이 달려 있습니다.
김창숙 선생은 우리나라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강제로 점령당하기 전부터 애국계몽운동에 매진하였고, 강점된 이후에는 독립운동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러던 중 일본에 의해 투옥되어 모진 고문으로 다리가 마비되는 등 오랫동안 고생하였다. 해방 후에는 신탁통치반대운동을 펼쳤고 성균관대학을 세워 초대 총장을 역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현재의 가옥은 안채,사랑채,판각고로 이루어져 있다.
선생이 태어난 건물은 그기 22세 되던 해인 대한제국 5년(1901)에 화재로 모두 불에 탔으며, 같은 해에 지금의 안채를 다시 지었다.
1991년에 사랑채와 판각고를 새로 지으면서 집에 흙돌담을 들렀다.
바로 옆 청천서당도 들러봅니다.
청천서당은 조선 시대의 학자이며 문신인 동강 김우옹을 모시던 청천서원이었으나,
조선 고종 때인 1868년 서원철폐령으로 헐린 후,
후손인 김호림이 종택의 사랑채를 고쳐,
서원을 대신할 교육기관인 서당으로 활용하면서
붙인 명칭이다.
근현대의 유학자이며 독립운동가인 김창숙은
김호림의 아들로서,
1910년 청천서당을 성명학교라고 부르고 애국계몽운동을 위한 학교로 활용하였으며,
일제강점기에 한동안 거주하기도 했다.
청천서당은 1991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청천서당 정면에 '성명학교'라는 문구가 보입니다.
위에 설명대로 일제강점기때
김창숙 선생이 청천서당을 애국계몽운동을 위한 학교로 이용했다고 합니다.
불천위(不遷位, 영원히 모시는 신주) 사당
동강 김우옹의 신주가 모셔져 있습니다.
이후 심산 김창숙 선생의 신주도
같이 모시고 있다고 하네요.
'동강구려'
김창숙 선생 생가,청천서당 들러보고
배롱나무가 이쁘게 피고 있는 청천서원도 한바퀴 돌아봤습니다.
청천서원(晴川書院)
청천서원은 '청담1942' 라는 한옥체험카페로도 이용되고 있습니다.
마을 어귀 '열부창녕조씨정려각' 앞 배롱나무도
꽃이 피기 시작했네요.
지금 쯤이면 아주 이쁜 모습일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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