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원재(追遠齋)
조선시대 사림의 우두머리인 김종직과 아버지 김숙자가 살았던 터에 자리한 재사(齋舍)이다.
아버지가 터를 잡고 아들이 평생 살았던 곳으로 '추원'은 '조상의 덕을 추모한다'라는 뜻입니다.
<김종직선생생가>
김종직 선생 생가로 가기 전 입구에 있는 김종직 선생 신도비
문충공 점필재 김선생 신도비
고려 말 우리나라에 들어온 성리학은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으로 이어집니다.
부자는 문과에 금제한 뒤 벼슬길로 나아가 관리로서 많은 업적도 남겼지만
성리학의 계보를 이어 뿌리 내리게 한 위대한 사상가였습니다.
조선시대 사림은 이곳을 정신적 고향으로 여기고 찾아와 두 사람의 학문적 정신을 기렸습니다.
그러나 김종직은 연산군 4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부관참시를 당합니다.
그 후 자손들이 흩어지고 생가가 제대로 보존되지 못한 채 낡고 허물어지자
사림과 후손들이 1810년 6칸 맞배지붕 목조 기와집으로 고쳐짓고 '추원재'라 불렀습니다.
집 이름인 당호는 '전심당'으로
그것은 '성리학의 전수자'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부관참시란 죽은 사람의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거는 일입니다.
무오사화에 대해서 알아보면
1498년(연산군 4년) 음력 7월 훈구파가 사림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한 사건이다.
사화가 일어난 1498년이 무오년이기에 "무오사화"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사초가 원인이 되었다하여 무오사화(戊午史禍)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4대사화 가운데 첫 번째 사화이다.
15세기 후반, 성종이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를 중용하자,
훈구파는 조정에 대거 진출한 사림파와 갈등하게 되었다.
그러던중 훈구파는 성종실록 편찬에 원고가 된 사초(史草)중에
《조의제문》의 불충함을 명분으로하여 연산군의 지원속에 사화를 일으켰다.
《조의제문》은 지난 계유정란(1453)때 있었던 세조의 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이었기에
격노한 세조의 손자 연산군은 관례를 깨고 사초를 근거로 사림파를 대거 숙청하였다.
무오사화 이후 사림파의 기세는 크게 위축되었고
견제세력이 사라진 조정은 다시 훈구파의 독무대가 되었다.
*계유정난은 1453년(계유년),
후에 세조로 즉위하는 세종의 차남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기 위하여
세종과 문종의 고명 대신이었던 김종서와 황보인 등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이후 단종 폐위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 집은 조선 초기 큰 유학자 강호 김숙자 선생이 살던 곳으로 지금까지 600여 년이 흐르는 동안
몇 차례 개축과 수리가 있었으며 그 장소는 변함이 없다.
1423년부터 40여 년 동안 강호 선생의 장남 김종석을 비롯하여 김종유,김종직 그 외 딸 둘 과 손주들이 태어놨으며
그 가운데 문과 급제자가 4명, 생원및 진사 급제자가 8명 나왔다.
김종석은 문과에 급제하고 성균관 직학(교수)에 이르렀으나 일찍 별세하였고
차남 김종유는 청송 교수관(교육감)을 지냈으며
삼남 김종직은 조선 성종 대에 활약한 문신이며 학자로서
성리학적 정치사상을 추구했던 사림파의 사조(師祖)이다.
김종직은 1453년에 진사 급제하였고
1456년 부친상을 당하였을 때는형과 같이 부친의 무덤 옆에서 시묘살이를 하였다.
1459년 시묘살이를 마친 후 형 김종석의 권유로 문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세조가 집현전을 없애고 글 잘하는 선비 10명을 선발하여 예문 연구를 겸하게 할 때는
형과 함께 선발되기도 했다.
김종직은 선산부사,전라감사,이조참판,형조판서를 지냈고
사망 이후에는 영의정에 봉해졌으며 시호는 문충공이다.
전심당
추원재 뒤쪽에 있는 김종직 선생 묘소도 찾아봤습니다.
문충공점필재김선생지묘
-2024년 5월 31일 밀양 추원재(김종직 선생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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