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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문화재 탐방

밀양 예림서원(禮林書院)

by 우보72 2024. 6. 13.

 

밀양 예림서원(禮林書院)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예림서원은 조선시대 사림의 우두머리였던 점필재 김종직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567년(명종 22) 밀양 부사 이경우가 창건하여 덕성서원이라 이름 붙였다.

 

뒤에 퇴계 이황이 김종직을 추앙하여 이름을 점필서원으로 바꾸고

친필의 편액을 걸었으나 임진왜란으로 퇴락되어

1606년(선조39) 위판을 봉안하고 서원을 중수하였다.

 

1635년(인조 13)지금의 상남면 예림리로 이건하였고

1637년 사림의 공의로 예림서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박한주,신계성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1669년(현종 10) 사액서원이 되면서 나라의 지원을 받았고

1680년(숙종 6) 화재로 묘우가 소실되어 지금의 위치로 다시 이건하였다.

 

1871년(고종 8) 서원철폐령으로 헐렸다가 건물이 하나둘 복구되면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김종직 생가 들러보고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밀양 예림서원도 찾아봤습니다.

이곳은 점필재 김종직 선생을 제향하고 있는 곳이라,

오후 7시 좀 늦은시간에도 불구하고 

찾아봤습니다.

 

 

독서루(讀書樓)

 

독서루 아래 삼문은 정문이고, 2층 누대는 유생들이 쉬면서 손님을 접대하는 곳입니다.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정문이 개방되어 있어서 

두루 두루 살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어서 너무 좋았네요.

 

요즘 유명한 서원 말고는 거의 문을 개방 하지 않아서

낮은 담장 너머로 살펴 보기는 하지만 오늘 다녀온 혜산서원과 예림서원은

정문이 개방되어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정문으로 들어서니 중앙으로 예림서원 강당인 구영당이 위치하고

서재와 동재인 돈선재와 직방재가 위치합니다.

 

돈선재와 직방재는 기숙사라고 보시면 됩니다.

 

 

 

정문으로 들어서자 마자 우측에는 열고각,좌측에는 몽양재가 위치해 있습니다.

 

열고각

 

 

몽양재

 

 

독서루에 올라 바라본 예림서원 전경

 

 

 

 

 

강당인 구영당

 

 

 

동재인 돈선재(敦善齋)

 

동재와 서재는 기숙사이고

여기도 위계질서가 있어 보통 선배들이 동재를 사용했습니다.

 

 

 

 

서재인 직방재(直方齋)

 

 

 

 

 

예림서원 편액

 

 

일신재(日新齋)

 

일신재는 교무실 정도로 보면 되겠네요.

 

 

 

 

 

구영당(求盈당) 편액

 

 

 

 

 

구인당 마루에 앉아 바라본 모습

 

 

내삼문

 

 

정양문(正養門)

 

 

육덕사(育德祠)

 

사당인 육덕사로 점필재 김종직 선생과

추가로 모신 박한주,신계성 선생을 제향하고 있습니다.

 

점필재 김종직 선생에 대해서는

앞선 포스팅인 김종직 선생 생가(추원재)편 참고하시면 될듯 하네요.

 

https://gopeak.tistory.com/521

 

 

 

박한주 선생은

 

본관은 밀양,자는 천지,호는 우졸재. 박돈인의 아들이며 김종직의 문인입니다.

 

연산군때 사간원 헌납,평해군수,예천군수를 지냈으며

연산군의 실덕을 직간하고 임사홍의 간악함을 탄핵했으며

1498년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평안도로 유배되었고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사후 1506년 중종반정으로 신원되었고, 1517년 김정,조광조 등의 계에 의하여

도승지 겸 예문관직제학이 추증되었습니다.

 

밀양 예림서원,함안 덕암서원, 대구 남강서원에 배향되어 있습니다.

 

 

신계성 선생은

 

본관은 평산,자는 자함,호는 석계,송계 이고 후세에 학자들이 송계선생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성현의 학문에 뜻을 두고 과거 공부는 하지 않았으며,

육경(六經)의 글에 침잠하고 『소학(小學)』의 내용을 실천하기에 힘썼다.

경(敬)을 마음을 가다듬는 요체로 삼았으며, 성(誠)을 경을 지키는 근본으로 여겼다.

 

송당(松堂) 박영(朴英)을 좇아 함께 지냈으며, 청도의 김대유(金大有), 김해의 조식과 사귀었다.

신계성이 항상 잊지 않았다는 고확(顧確)과 경의(敬義) 공부는 남명의 경의 사상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조정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선생은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처사로 살았다.

 

1562년(명종 17) 5월 21일 64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김해 신산서원과 밀양 예림서원에 배향되어 있습니다.

 

 

 

 

 

베롱나무도 멋지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꽃피면 참 운치나겠죠.

 

 

 

 

 

 

 

 

 

예림서원 위로 구름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한참동안 쳐다보았네요.

 

 

 

노송과 어우러진 독서루 풍광이 너무 좋았습니다.

 

 

 

 

 

늦은 시간 도착했지만 개방되어 있어서 예림서원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뜻깊은 시간이었네요.

 

오후 시간 밀양에 도착해서 상동 명품장미길을 시작으로

박연정,혜산서원,용호정,월연정 그리고 위양지와 김종직 생가 추원재에

이어서 예림서원까지

알차게 잘 둘러보고 복귀했습니다.

 

 

 

 

-2024년 5월 31일 밀양 예림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