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610 재약산 옥류동천,흑룡폭포 흑룡폭포(2024년 6월 30일) 거대한 물줄기를 품어내는 흑룡폭포는 홍룡폭포로 불리기도 하며,흑룡이 하늘로 비상하는 듯하여 "흑룡폭포" 부른다.위 아래로 소가 있고 2단 폭포로 되어 있으며 가까이 접근 할 수 없을 만큼협곡에 위치하고 있는 사람의 손길을 거부하는 폭포이다. 표충사-흑룡폭포전망대 이동거리: 2km 정도 소요시간: 편도 40분~1시간 정도 표충사 둘러보고 시간도 늦었고 해서흑룡폭포전망대까지만 다녀오기로 합니다. 최근 잦은 비로 옥류동천 수량이 아주 좋습니다. 흑룡폭포 전망대까지는 최근 정비되어 포장도 잘 되어있고데크도 잘 되어 있어서 길은 편안하게 이어집니다. 흑룡폭포는 '홍룡폭포'라고도 부른다고 하는군요.양산 천성산 홍룡사 근처에도 홍룡폭포가 있지요. .. 2024. 7. 6. 밀양 표충사,표충사 계곡(2024년 6월 30일) 반계정 들러보고 가까운 거리에 있는 표충사로 왔습니다.최근 비가 시원하게 내렸으니 표충사 계곡과 흑룡폭포에 수량이 좋을 듯 하여시원한 물줄기도 구경하며 걸어봅니다. 표충사 계곡 수량 좋습니다.날만 좋으면 시원하이 한번 담구고 가면 좋겠네요. 비 온후 풍경이라 운치납니다. 표충사 계곡 중에 여기가 제일 핫한 장소죠.성질 급한 분들은 벌써 입수 했네요.물살이 거세니 안전에 유의해야 할듯 합니다. 이제보니 재약산이 아니고 '재악산표충사(載岳山表忠寺)'라고 적혀 있네요. 연유를 찾아보니 표충사 주지 진각 스님은 “재악산이라는 명칭은 표충사 삼층석탑에서 출토된 ‘재악산영정사삼층석탑개수비’를 비롯해 수많은 사적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며 “표충사는 이 같은 역사적 자료를 토대로 .. 2024. 7. 5. 밀양 반계정(盤溪亭) 포장길 끝나는 지점에 주차하고 걸어갑니다. 반계정까지는 200미터 정도 비포장길로 이어지더군요. 밀양 반계정(盤溪亭)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초야에 묻혀 지냈던 조선 후기 유학자 이숙(李潚)이1775년에 단장천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넓은 바위 위에 지은 정자이다. 돌을 깍아내지않고 자연석 위에 그대로 집을 짓고,담장은 냇물을 보는 데 지장 없도록 낮게 조성한 점이 특징이다. 평평한 돌 위로 강물이 흘러가는 풍광에 반해자산의 호를 '반계'라고 짓고 정자 이름으로도 삼았다. 반계정도 베롱나무 맛집인듯 합니다.올 여름 베롱나무 꽃구경하러 다니는 재미만 해도 쏠쏠할듯. 주인장은 출타하셔는지 문은 잠겨 있었고'개조심' 문구 처럼 안에서 개 짖는 소리만 요란하였다. 여름.. 2024. 7. 5. 밀양 죽원재사(竹院齋舍) 죽원재사(竹院齋舍)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재사는 학문이나 덕행,충효 등이 뛰어난 인물을 추모하기 위해묘소나 사당 옆에 지은 건축물이다. 죽원재사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팔공산성 등에서 왜적과 싸운 오한 손기양(聱漢 孫起陽)을 기리기 위해1753년에 후손들이 세웠다. 밀양 죽원재사 밀양시 산외면 행정복지센터를 지나다죽리 다원2구 마을 뒷편 산자락으로 올라서면 죽원재사가 나온다.죽원재사 앞에 공터가 있어서 적당한 곳에 주차하고 들러본다. 참고로 다죽리 마을 중 혜산서원이 있는 다원1구는 일직 손씨 세거지이고,죽원재사가 있는 다원2구는 밀성(밀양) 손씨 세거지이다. 다원 2구인 죽동 마을의 옛 이름은 죽원,죽동,다원으로 불리었는데,조선 초기에 생원 손 겸제 선생이 입촌한 후 밀성 손씨 세거지가 되었.. 2024. 7. 5. 밀양 내촌마을 수국동산 밀양 내촌마을 수국동산(2024년 6월 30일) 밀양내촌마을에 수국동산이 있다는 걸 알게 되어 금시당.백곡재 들러보고이동하는 동선에 있어서 들러봤습니다. 2주전에 한창 좋았던것 같은데좀 늦긴 했지만 지금도 볼만한 풍경이었습니다. 내촌마을 가는길에 보담산이 너무 멋진 모습 보여주어서사진에 담아봤습니다. "보담산" 예전에 비학산,보담산,낙화산,중산을 거쳐 오치령까지산행했던 기억이 납니다. 내촌마을 올라가는 풍경이 좋습니다. 주차장은 따로 있지 않고 도로 갓길에 주차하면 됩니다.동네주민들이 주차 안내를 하고 있었습니다. 늦게 왔는데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상태가 좋았습니다. 잘 구경하고 근처 행선지로 이동했습니다. 2024. 7. 4. 밀양 금시당(今是堂),백곡재(栢谷齋) 밀양 금시당(今是堂),백곡재(栢谷齋)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금시당은 조선 명종 때의 문신 이광진이 지은 별서이다. 이광진의 호는 금시당,자는 여임,본관은 여주이다. 이광진은 관직에서 물러난 뒤 고향인 밀양으로 돌아와, 밀양강이 굽이치는 언덕 위에 금시당을 짓고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금시당이라는 이름은 이광진의 호이기도 한데, '지금(今)이 옳다(是)'라는 뜻을 담고 있는 '금시(今是)'에서 비롯된 표현이다. 이는 중국의 시인 도연명이 지은 귀거래사의 한 구절인 "각금시이작비( 覺今是而昨非): 지금이 옳고 지난날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 에서 따온 말이다. 밀양 금시당백곡재 금시당 입구에 주차하고 올라갑니다. 비가 그친 후 밀양강 풍경이 아주 좋습니다. 수령 420년의 금시당 은행나무는 금시당 이광진이 직.. 2024. 7. 4. 밀양 월연정(月淵亭)(2024년 6월 30일) 오연정 들러보고 금시당 가는길에지난 5월에 다녀왔던 월연정 다시 들러보았습니다. 월연정은 본래 월영사라는 사찰이 있던 곳으로한림학사를 지낸 월연 이태(李迨)선생이1520년에 세운 정사(亭舍)입니다. 월연 이태(李迨)의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중예(仲豫), 호는 월연(月淵)지돈녕부사 이자(李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증석(李曾碩)이고,아버지는 교위(校尉) 이사필(李師弼)이며,어머니는 진사 유자공(柳子恭)의 딸입니다.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이었습니다. 쌍경당은 정면5칸,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습니다. "쌍경당" 베롱나무 꽃은 아직 이네요. 쌍경교 "월연대" "월연대(月淵臺)" 월연정이라는 편액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월연정이 없는 월연.. 2024. 7. 4. 밀양 오연정(鼇淵亭) 밀양 오연정(鼇淵亭)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오연정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추천 손영제가 지은 정자이다. 손영제는 이황의 제자로 학문과 정치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으며,조선 명종때 정랑을 거쳐 예안,김재,울산 군수 등을 지냈다. 손영제(1521~1588)의 본관은 밀양이고,자는 덕유,호는 추천(鄒川)이다.증조할아버지는 통용교위 손신복(孫信復), 할아버지는 충순위 손세번(孫世蕃)이다. 아버지는 군자감정 손응(孫凝)이고, 어머니는 이조참판 조효동(趙孝洞)의 손녀로 조광원(趙光遠)의 딸인 함안조씨(咸安趙氏)이다. 아내는 달성서씨 평장사 서균형(徐勻衡)의 후손인 현감 서시중(徐時重)의 딸이다. 자식은 5남 2녀이다. 손영제는 밀양의 향반이면서, 밀양손씨 교동파의 파조이다.1588년 6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묘소는.. 2024. 7. 4. 애국지사 매운 이정희 선생 추모공원,임란창의 고성 이씨 청도 오의사 숭모단 유등연지 둘러보고 도로 건너편에 있는 애국지사 이정희 선생 추모공원 들러봤습니다. 애국지사 매운 이정희 추모공원 애국지사 매운 이정희 선생 추모비와 흉상 매운(梅雲) 이정희(李庭禧) 선생 이정희 선생의 자는 내길이요 호는 매운, 본관은 고성이다. 선생은 일제강점기 비밀결사 조선국권회복단, 대한광복회 등에 참여하여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1915년 비밀결사 단체인 조선국권회복단 조직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조선광복회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3·1운동 이후에는 고향 청도에서 온명학교를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바로 옆에 임란창의 고성이씨 청도 오의사 숭모단이 보입니다. 임란창의 고성 이씨 청도 오의사 숭모단 숭모단에 있는 비문 내용 중 일.. 2024. 7. 3. 청도 유등지(유등연지,유호연지) 2024년 6월 30일 청도 유등연지(2024년 6월 30일) 유등연지는 청도 팔경중의 하나로 유호연지, 신라지로 불리기도 하며,둘레가 600m, 깊이가 2m에 이른다. 유등연지는 고성이씨 청도 입향조인 모헌 이육이무오사화로 인해 청도 화양읍 유등리에 은거하면서연을 심고 군자정을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이육이 '연은 꽃 중에 군자다' 라고 하며 연을 심고못 위에 정자를 지어 군자정이라고 하였다. 선생이 이곳에 연을 심은 것은비록 몸은 주류에서 쫓겨나 은둔하게 되었으나연꽃처럼 청정한 군자의 삶을 살고 싶었던 뜻을 담고 있다. 이후,이곳에서 문우들과 시를 읊기도 하고후학들에게 글을 가르치면서유유자적한 여생을 보냈다. 유등연지(경북 청도군 화양읍 유등리 783-3) 비가 억수로 내리는 가운데 청도 유등지(유등연지) 찾아.. 2024. 7. 2. 청송 월정리 침류정(枕流亭),동와정(東窩亭) 청송 월정리 침류정(枕流亭)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 266호 청송 월정리 청류정은 경상북도 청송군 현서면에 월정리에 있는 정자이다. 침류정은 조선 중기 학자인 김성진이 후학 양성에 전념하기 위해 지은 정자로 김성진은 학식이 높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후학을 위해 문집 목판각을 만들어 책을 인쇄하여 널리 보급하였다. 건물을 세운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임진 왜란 뒤인 17세기의 건물로 추정된다. 계곡을 낀 낮은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으며, 주변의 커다란 나무들과 함께 어우러져 멋진 풍광을 연출한다. 월정리 침류정(경북 청송군 현서면 월정리 264) 청송 현서면 소재지 지나 월정리 부근에 다다르니, '의성 김씨 세거지'라고 적힌 커다란 표석이 보이는 마을입구를 지나자마자 진행 방향 좌측으로 '월정리 .. 2024. 7. 2. 청송 안덕 송학서원(松鶴書院) 송학서원(松鶴書院)청송군 향토문화유산 제3호 청송지역 유림들은 퇴계 이황이 유풍을 진작하고 유교 진흥에 공이 많은 점을 평소 칭송하였으며, 당저의 외가에서 태어난 학봉 김성일과 여헌 장현광의 덕도 흠모하였다. 이들의 공적을 기리고 위패를 봉안하고자 이 지역 유림들이 조선 숙종 28년(1702)에 당저(현 명당3리)에 최초로 서원을 건립하였다. 조선 고종 5년(1868)에 서원 철폐령으로 일부가 헐리고, 이후 서당으로 사용되다가 1996년에 다시 송학서원으로 개명되었고, 2010년 사당이 건립되었다. 송학서원(경북 청송군 안덕면 장전리 958-3) 안동 길안쪽 묵계서원,만휴정,보백당종택 들러보고 오는 길에 청송 안덕 송학서원 들러봤습니다. 송학서원이라는 이름은 이황이 단양 군수로 재임 중일 때 *관향인 청.. 2024. 7. 1. 안동 보백당종택(寶白堂宗宅) 안동김씨 보백당종택 종택은 가문의 맏이가 대대로 살아온 집을 가리킨다. 보백당 종택은 조선시대 문신 보백당 김계행의 종택이다. 종택은 풍산읍 상리마을에 있었으나, 후대에 모두 불타면서 근처의 고란리로 옮겼다가 1800년대 후반 현재의 위치로 자리잡게 되었다. 종택은 중심이 되는 집인 ㅁ자형의 정침, 사당, 사랑채인 보백당,그리고 대문채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전쟁으로 종택의 정침 일부가 불탔으나, 1958년 현재의 건물로 복원하였다. 보백당종택 (경북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 705) 김계행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취사(取斯), 호는 보백당(寶白堂)이다. 김득우(金得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혁(金革)이고, 아버지는 비안현감 김삼근(金三近)이며, 어머니는 김전(金腆)의 딸이다. 1447년 진사가 되고.. 2024. 6. 29. 안동 만휴정(晩休亭) 만휴정(晩休亭) 만휴정은 조선 전기의 문신 보백당 김계행이 1500년에 지은 정자이며 말년에 독서와 학문을 연구하던 곳입니다. 만휴정의 이름은 '말년에 쉬는 정자'라는 의미에서 지은 것인데, 본래 이름은 '쌍청헌'이라 하였다가 나중에 '만휴정'으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만휴정 주차장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 1127-85) 주차비는 무료인데 관람료 2천냥 있습니다. 만휴정 주차장 미스터 선샤인 여파인지 차도 많고 사람도 많더군요. 주차장에서 만휴정까지 오르막길로 500미터 정도 가야됩니다. 마을길 지나오니 안내소가 보이네요. 그런데 생각도 못한 관람료가!!! 헉~ 정자 하나 땜시 관람료 2천원을 내야 하나 싶기도 하고 멀리 왔는데 안 보고 갈수도 없고... 2천원 지불하고 입장합니다. 요금안내와 주의사항(2.. 2024. 6. 28. 안동 묵계서원(默溪書院) 안동 묵계서원(默溪書院)경상북도 민속문화재 묵계서원은 조선 초 문신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溪行)과 응계(凝溪) 옥고(玉沽)의 덕행과 청백 정신을 기리기 위해 숙종 13년(1687)에 창건되었으며 숙종 32년(1706) 사당을 세워 두 사람의 위패를 모셨다.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溪行) 본관은 안동,자는 취사,호는 보백당,시호는 정헌이다. 김계행은 지금의 하리리인 풍산현 불정촌에서 태어나 5세 때 부친을 따라 소산에서 자랐으며, 성종 11년(1480)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로 불리는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요직을 지냈다. 대사간일 때 연산군의 폭정을 막고자 노려하였으나 고쳐지지 않자 연산군 4년(1498)에 안동으로 돌아와 후학 양성에 힘썼으며 청백리로 추앙받고 있다. 보백당이라는 이름은 "우리 집에.. 2024. 6. 27. 이전 1 ··· 12 13 14 15 16 17 18 ··· 4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