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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문화재 탐방199

가슬갑사 유적지(嘉瑟岬寺 遺蹟地) 비석 문복산 계살피계곡 등로에 보이는 가슬갑사 유적지 비석  가슬갑사(嘉瑟岬寺)는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산에 대작갑사(大鵲岬寺, 현재 운문사)를 중심으로 형성된 오갑사(五岬寺) 가운데 하나이다. 오갑사는 대작갑사를 중심으로 서쪽의 소작갑사(小鵲岬寺), 남쪽의 천문갑사(天門岬寺), 북쪽의 소보갑사(所寶岬寺), 동쪽의 가슬갑사로 구성되었다.  『운문사사적』에는 오갑사가 진흥왕 때 창건되었다고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600년(진평왕 22)에 원광(圓光) 법사가 수나라에서 유학을 마친 후에 돌아와 가슬갑사에 머물렀으므로 적어도 이때보다 앞선 시기에 사찰이 건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광은 가슬갑사에서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열고 점찰보(占察寶)를 두었으며,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에게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주었.. 2024. 7. 12.
독립유공자 직산 김창열 선생 기념비 청천서원 직전에 독립유공자 직산 김창열 선생 기념비가 보여서 살펴보았다.   '직산김창열선생기념비' 선생은 동강 김우옹 선생의 13대 손으로 아명은 원술, 자는 성무, 호는 직산. 본관은 의성이다.서기 1897년 정유 5월 12일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동 사도실 535번지에서 諱철림공의 차남으로 출생 하였다. 선생은 1910년 치욕적인 경술합방조약이 체결 되었을 때 불과 14세의 어린 나이에 을사능약 5적을 성토하는 등 깨어있는 민족의식으로 족형 심산 김창숙 선생을 도와 '유림단 사건' 에서 적지 않은 역활을 하였다. 1919년 마침내 거국적인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약관 23세의 몸으로 배상윤,서병준,백성흠,노기하,박경하,김귀진 등과 수많은 태극기를 손수 만들어 4월 2일 성주시장에서 군중들에게.. 2024. 7. 11.
성주 청천서원(晴川書院) 청천서원(晴川書院) 청천서당은 1729년(영조 5) 사림에 의해 동강 김우옹을 제향하기 위해 처음에는 청천서원으로 창건되었다. 고종 때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며, 이후 김우옹의 후손 김호림이 종택의 사랑채를 고쳐 청천서당으로 중건되었다.  서당으로 중건된 후 1910년(순종 4) 봄에 김호림의 아들 심산 김창숙이교육 구국 운동으로 서당을 수리하여 성명학교라 부르고,후진 양성을 위한 교사로 활용하였다.   회연서원과 함께 성주 지역을 대표하는 서원으로서 사림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김우옹을 중심으로 성주군에서 학문으로 뛰어난 인물들을 배향한 곳이자,성주 사림 활동의 중심이 되는 곳이었다.  또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에 힘쓴 성주군의 유학자 김창숙이 후진을 양성하는 공간으로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교육적.. 2024. 7. 11.
성주 수성리 중매댁,갖말의 유래,숙야재(夙夜齋) 회연서원 둘러보고 성주쪽으로 넘어가면서성주 수성리 중매댁 표지판이 보여서 들러보고 갑니다.           이 가옥은 1903년(광무 7)에 현 소유자의 조부인 정재철이 건립한 가옥이다.창건시에 안채,사랑채,대문채를 건립하였고,1911년 고방채, 1915년에 안대문채 순으로 건물을 추가로 건립하였다.가옥의 이름을 '중매댁'이라고 명명한 것은 현 소유자의 조모가칠곡 매원의 중매마을에서 시집온 데서 연유한다.                수성리 중매댁이 있는 갖말 마을에 있는 공원   갖말의 유래와 공원 조성비 갖말은 '가지'와 '마을'을 줄인 순우리말로 한자어로는 '지촌(枝村)'이다.이 마을이 구체적으로 언제 이루어졌는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으나,나무를 가꾸며 서서히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갖말은 한강 정.. 2024. 7. 11.
성주 회연서원(檜淵書院),한강(寒岡) 정구(鄭逑) 회연서원(檜淵書院) 회연서원은 인조 5년(1627)에 유림들이 한강 정구(寒岡 鄭逑)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회연초당이 있던 자리에 회연서원을 세웠으며, 숙종 16년(1690)에 왕으로부터 '회연'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렸다가, 1974년에 복원되었다. 회연서원에는 교육 공간인 강당, 정구의 위패를 모신 사당,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인 전사청, 유물을 전시한 숭모각, 지역 선대 유학자의 위패를 모신 향현사 등이 있다. 정구 선생이 직접 조성한 앞뜰인 백매원에는 신도비가 있다.     경북 성주군 수륜면 신정리 256-1   현도루(見道樓)  현도루는 학문의 길 즉 도(道)를 알현한다는 뜻으로見자를 볼견으로 읽지.. 2024. 7. 11.
(합천)내암 정인홍 선생 묘소 가야산면소재지에서 가야산 백운동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면 내암 정인홍 선행 묘소 표지판이 보인다.       합천 정인홍 묘경상남도 기념물 남명 조식의 수제자인 내암 정인홍의 묘이다.정인홍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랑때에 의병장으로 활동한 인물이다.조선 선조에서 광해군에 이르는 시기에 북인의 정치적,학문적 수장으로서 큰 영향을 끼쳤다. 정인홍은 인조반정이 일어난 광해군 15년(1623)에 역적으로 처형당햇기 때문에그이 묘를 세상에 알리지 못하였다. 고종 1년(1864)에 와서야 후손들이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였으며,순종 2년(1908)에 복귀되었다. 묘 앞에 세워진 석물은 모두 일제 강점기 이후에 조성된 것이다.           묘소에서 가야면소재지가 내려다보였다.      -2024년 6월 1일 내암 정인홍 선.. 2024. 7. 10.
(합천)부음정(浮飮亭),내암 정인홍(來庵 鄭仁弘)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  정인홍(鄭仁弘,1536~1623)선생의 자는 덕원(德遠),호는 내암(來庵),본관은 서산(瑞山)이다.조선 중기 문인으로 남명 조식 선생의 수제자이다.명종 13년(1588)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선조 5년(1572) 세 정승과 이조의 추천으로 황간 현감으로 제수되었다.이듬해에는 최고의 목민관으로 보고되어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으며, 산림(山林) 장령이란 명성을 얻었다.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3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낙동강 연안 전선에서 왜군을 격파해 진주성을 회복하였고, 1593년 1월 성주성을 탈환하였다. 그 전공을 인정받아 영남의병도대장이 되었고, 정유재란 때에는 유일하게 기병(起兵)하여 명나라 장수들로부터 전란 중 최고의 수훈자로 평가받았다.선조 35년(1602) 사.. 2024. 7. 10.
합천 청량사(淸凉寺) 천불산(千佛山) 청량사(淸凉寺) 청량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 12교구의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이다. 청량사의 창건연대의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전해오는 말로는 해인사보다 먼저 창건되었다고 한다.  최치원조에이 절은 최치원이 즐겨 찾던 곳이라고 기록 되어 있으므로통일신라 시대에 창건되었던 것으로 주정된다. 중요문화재로는 9세기초부터 이절을 지켜온돌부처님(청량사 석조여래좌상,보물265호),신라 석탑의 대표적인 양식을 지닌 석탑(보물 제266호),9세기 끝 무렵의 치레수법이 아름다운 석등(보물 제253호)등이 있다. 청량사가 자리하고 있는 산 이름은 본래는 천불산(千佛山,1,010m)이며,남산제일봉(南山第一峰),매화산은 천불산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청량사 뒤로 보이는 암봉 예전에는 '월류봉'이라고 했다고.. 2024. 7. 10.
경재선생 하연,연당공 하우명 충효문 경재선생 하연,연당공 하우명 충효문 충효문은 문효공(文孝公) 하연과 연당공(連塘公) 하우명 부자의 충효각이다.     해인사IC를 빠져나와 가야 방면으로 가다보면매촌리 마을 지나 오른쪽으로 보인다.      영의정문효공경재하연지문 하연(河演,1376~1453)은 조선 초기 영의정을 지낸 문신이다. 본관은 진양(晉陽),자는 연량(淵亮), 호는 경재(敬齋) 또는 신희옹(新稀翁)이다진주 하씨(진양 하씨) 사직공파의 시조이기도 하다. 그는 태종,세종조에 영의정과 세자의 스승을 역임 하였던 청직한 문신이며,경상도 지리지를 편찬하고 인재양성에 힘썼다. 효심 또한 지극하여 응석역당을 지어 증조부,조부,선친 영정을 봉안하고청백리로 선정되어 문종묘에 배향되고 서원에 봉안 되었다.    효자동지중추부사연당하우명지문 연당공.. 2024. 7. 9.
수릉봉산계 표석(綏陵封山界 標石) 팔공산 수태골 입구에서 등로따라 동봉 방향으로 오르다 보면수릉봉산계 표석이라는 문화재 안내판이 나온다.   수릉봉산계 표석 위치(대구광역시 동구 신무동 산 6번지)   수릉봉산계 표석(綏陵封山界 標石) 대구시 광역시 문화유산자료 "이 표석은 산림자원을 보호하기 위해 출입금지 구역의 경계를 표시한 것이다. 수릉은 조선조 헌종의 아버지인 익종의 능을 말한다. 봉산계( 封山界)는 수릉의  유지관리와 제사에 쓰이는 경비의 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이 구역의 산림을 보호림으로 정하여 일반인의 벌목과 입산을 금지하는 일종의 푯말이다. 이 표석은 팔공산 집단시설지구 안에 있는  ‘수릉향탄금계(綏陵香炭禁界)’표석과 글자의 크기와 규격이 비슷하여 같은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아, 이 일대가 보호림으로 지정되었음을 말해 준다.. 2024. 7. 8.
베롱나무,능소화가 활짝 핀 난포고택(蘭圃古宅) 난포고택 베롱나무(2024년 7월 6일)         난포고택 베롱나무가 활짝 피었다는 소식을 듣고청도쪽 산행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들러보았습니다.  용산리로 넘어오면서  무명 소류지에 이쁘게 피어 있던 자귀나무 한그루   난포고택에 도착하니 좌측에 베롱나무가 활짝 피어 있습니다.좌청룡 우백호가 아니고 좌 베롱 우 능소화인가요.ㅎㅎ  이쁘게 피었습니다.다른곳보다 개화가 빠른 편이네요.    고택과 어우러져 풍미가 아주 좋습니다.                    일주일전에 보고 왔던 능소화도 아직 참한 모습입니다.        난포고택은 영천 최씨 최한의 14세손인 최철견이경북 영천 창수(현 영천 금호)에서 현 위치로 이거하여,명종 원년에 축조한 주택입니다. 난포는 최철견의 호입니다.         -.. 2024. 7. 7.
밀양 표충사,표충사 계곡(2024년 6월 30일) 반계정 들러보고 가까운 거리에 있는 표충사로 왔습니다.최근 비가 시원하게 내렸으니  표충사 계곡과 흑룡폭포에 수량이 좋을 듯 하여시원한 물줄기도 구경하며 걸어봅니다.   표충사 계곡  수량 좋습니다.날만 좋으면 시원하이 한번 담구고 가면 좋겠네요.        비 온후 풍경이라 운치납니다.    표충사 계곡 중에 여기가 제일 핫한 장소죠.성질 급한 분들은 벌써 입수 했네요.물살이 거세니 안전에 유의해야 할듯 합니다.    이제보니 재약산이 아니고 '재악산표충사(載岳山表忠寺)'라고 적혀 있네요. 연유를 찾아보니 표충사 주지 진각 스님은 “재악산이라는 명칭은 표충사 삼층석탑에서 출토된 ‘재악산영정사삼층석탑개수비’를 비롯해 수많은 사적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며 “표충사는 이 같은 역사적 자료를 토대로 .. 2024. 7. 5.
밀양 죽원재사(竹院齋舍) 죽원재사(竹院齋舍)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재사는 학문이나 덕행,충효 등이 뛰어난 인물을 추모하기 위해묘소나 사당 옆에 지은 건축물이다. 죽원재사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팔공산성 등에서 왜적과 싸운 오한 손기양(聱漢 孫起陽)을 기리기 위해1753년에 후손들이 세웠다.    밀양 죽원재사    밀양시 산외면 행정복지센터를 지나다죽리 다원2구 마을 뒷편 산자락으로 올라서면 죽원재사가 나온다.죽원재사 앞에 공터가 있어서 적당한 곳에 주차하고 들러본다. 참고로 다죽리 마을 중 혜산서원이 있는 다원1구는 일직 손씨 세거지이고,죽원재사가 있는 다원2구는 밀성(밀양) 손씨 세거지이다. 다원 2구인 죽동 마을의 옛 이름은 죽원,죽동,다원으로 불리었는데,조선 초기에 생원 손 겸제 선생이 입촌한 후 밀성 손씨 세거지가 되었.. 2024. 7. 5.
밀양 내촌마을 수국동산 밀양 내촌마을 수국동산(2024년 6월 30일)       밀양내촌마을에 수국동산이 있다는 걸 알게 되어 금시당.백곡재 들러보고이동하는 동선에 있어서 들러봤습니다. 2주전에 한창 좋았던것 같은데좀 늦긴 했지만 지금도 볼만한 풍경이었습니다.  내촌마을 가는길에 보담산이 너무 멋진 모습 보여주어서사진에 담아봤습니다.   "보담산" 예전에 비학산,보담산,낙화산,중산을 거쳐 오치령까지산행했던 기억이 납니다.   내촌마을 올라가는 풍경이 좋습니다.   주차장은 따로 있지 않고 도로 갓길에 주차하면 됩니다.동네주민들이 주차 안내를 하고 있었습니다.   늦게 왔는데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상태가 좋았습니다.                                            잘 구경하고 근처 행선지로 이동했습니다. 2024. 7. 4.
밀양 금시당(今是堂),백곡재(栢谷齋) 밀양 금시당(今是堂),백곡재(栢谷齋)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금시당은 조선 명종 때의 문신 이광진이 지은 별서이다. 이광진의 호는 금시당,자는 여임,본관은 여주이다. 이광진은 관직에서 물러난 뒤 고향인 밀양으로 돌아와, 밀양강이 굽이치는 언덕 위에 금시당을 짓고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금시당이라는 이름은 이광진의 호이기도 한데, '지금(今)이 옳다(是)'라는 뜻을 담고 있는 '금시(今是)'에서 비롯된 표현이다. 이는 중국의 시인 도연명이 지은 귀거래사의 한 구절인 "각금시이작비( 覺今是而昨非): 지금이 옳고 지난날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 에서 따온 말이다. 밀양 금시당백곡재 금시당 입구에 주차하고 올라갑니다. 비가 그친 후 밀양강 풍경이 아주 좋습니다. 수령 420년의 금시당 은행나무는 금시당 이광진이 직.. 2024. 7.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