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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여행,문화재 탐방199

군위 화산산성 풍차전망대 군위 화산산성  풍차전망대(2024년 5월 16일) 해발 700미터에 경북 유일의 고랭지 채소를 재배하는 청정지역으로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고 있으며 전망대에 오르면 커다란 풍차와 액자 포토존도 있어사진 찍고 경치 감상하기에 좋은 곳이다.     화산산성 풍차전망대      군위,의성쪽으로 넘어가면서화산산성 풍차전망대에 들러 구경했습니다.  화수삼거리 직전 갈림길에서 화산마을 입구까지는아스팔트 포장이 완료 되어서도로 폭도 넓어지고 이전 보다는 아주 쾌적하게 올라갔는데 입구에서 풍차 전망대까지는여전히 좁은 골목길이라 운전에 주의해야했습니다.   풍차전망대 가는 길에 내려다 본 모습    군위 조림산 보입니다.  화산산성 풍차전망대 풍차전망대 앞에 10여대 정도 주차공간 있습니다.  화산마을 풍경이 아주 좋습.. 2024. 6. 21.
청도향교(淸道鄕校) 청도향교에 도착하니 향교 앞 주차장은 넓직하니 참 좋았고문도 개방되어 있어서 둘러보기에 아주 좋았습니다.더운 날씨인지라 쉬엄쉬엄 구경했습니다.  청도향교(淸道鄕校)향교는 유학을 가르치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나라에서 지은 지방 교육기관이다.향교가 공립 교육기관이라면 서원은 사립 교육기관이라고 보면됩니다. 청도향교의 건립 연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조선 선조 원년(1568)에 군수 이의경이 고평리에 세웠다고 전해진다.그 후 여러 차례 자리를 옮겨 지었다가,영조 10년(1734) 군수 정흠선이 현재의 자리인 교촌리에 지었다. 건물의 구성은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대성전과강학공간인 명륜당,동.서재,사락루로 구성되어져 있다. 일반적인 향교에서는  전학후묘로 건물을 배치하는데,청도향교는 좌묘우학의 구성을 보여 주.. 2024. 6. 20.
청도읍성(淸道邑城) 청도읍성(淸道邑城) 읍성은 지방관아가 소재한 고을의 방어를 목적으로 축성된 성곽이다.청도읍성 처음 축성된 시기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고려시대부터 있었다고 전해지며현재의 규모는 조선서대 선조 년간에 이루어진 것이다. 선조 때 왜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동래에서 서울로 향하는 주요 도로변에 성을 수축하였는데청도군수 이은휘가 선조 23년(1590)에 시작하여 2년 후 완공하였다.둘레가 약 2km,높이는 약 1.8m이며 동문.서문.북문이 있었다. 임진왜란과 여러 번의 화재로 소실되기도 하였지만수 차례 개축하여 읍성을 유지하여 왔고,고종 7년(1870년) 남문을 건립하여 4문을 갖추게 되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도시화와 도로개설로 문루는 철거되고성벽 일부는 훼손되었으나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5년 경상.. 2024. 6. 20.
청도 대적사(大寂寺) 극락전(極樂殿) 대적사 극락전보물 제836호        청도 와인터널 입구 좌측으로  80미터 정도 올라가면 대적사가 나옵니다.         대적사(大寂寺)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 이 곳은 본래 신라시대에 큰절이 있던 자리였다.오랫동안 인적이 끊어졋다가조선시대에 들어와 이 자리에 초옥 3칸의 암사를 짓고대적사라 하였다고 합니다. 이후 대적사는 숙종 15년(1689) 성해대사가 삼존볼을 모시면서사찰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고 하네요.   대적사 극락전(大寂寺 極樂殿)보물 제836호 극락전은 18세기 경 에 건립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기단부는 2단으로 조성되었는데 삼층기단의 전면에연꽃무늬와 거묵무늬가 돋을 새김되어있다. 기단부 주변에는 H자형 선각이 연속적으로 새겨져.. 2024. 6. 20.
폭염탈출, 시원한 청도 와인터널 청도 와인터널(2024년 6월 15일) 청도 와인터널은 1904년에 완공 된 1,015m의 옛 경부선 터널입니다. 국내 유일의 적벽돌 터널로다량의 음이온을 배출하여 와인 숙성에 최적화 되어 있고110년이 넘는 세월의 흐름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청도 와인터널 주차장 비수기때는 와인터널 앞 주차공터에 주차가 가능하지만휴가철 등등 성수기에는 입구 주차장에 주차하고올라가야됩니다.  주차비는 무료이고입장료는 원래는 있었는데코로나 이후 현재는 무료입니다.   와인터널 입구에 주차하고 둘러봅니다. 오늘 와인터널 오게 된 이유는와인터널 구경도 있지만와인 터널 바로 옆에 있는 보물 제 836호인대적사 극락전 답사의 목적도 있습니다. 문화재나 절에 관심 있는 분들은 같이 둘러보셔도 좋을 듯 하네요.   좌측은 대적사.. 2024. 6. 19.
맥반석 동굴 법당 부엉산 성굴사,분청사기 가마터 맥반석 동굴 법당 경산 성굴사     경산 남천쪽이 맥반석으로 유명한데,알아봅니다.  맥반석(麥飯石)(보리 맥자, 밥 반자) 비학술적으로 분류된 암석의 일종으로,중성질 반암에 해당한다.민간 요법 등에서 특정한 효능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바위,돌에 마치 보리밥 알갱이가 붙은 것 같아 맥반이라는 단어가 붙었다고 하네요. 실제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은'맥반석 오징어'가 아닌가 싶습니다.     경흥사 들러보고 나오는 길에 근처에 있는 맥반석 법당이 있는  부엉산 성굴사와분청사기 가마터 찾아봅니다.  성굴사 주차장  부엉산 성굴사  모골 계곡 모습 올라오는데 모골 쪽에 백숙집도 몇개 보이는것이여름에 이쪽으로 제법 놀러오나 보더군요.      약사여래불  성굴사 대웅전    맥반석 법당 지장전  동굴.. 2024. 6. 19.
경산 동학산 경흥사(慶興寺) 동학산 경흥사(慶興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이다. 659년(무열왕 6) 혜공(慧空)이 창건한 이후 여러 차례의 중건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의승군(義僧軍) 700∼800명이 이곳에서 최초로 훈련을 받고 전쟁에 참가하였다.1990년 대웅전 주차장불상의 복장(腹藏)에서 사적기가 발견되었는데, 여기에 따르면 4∼5개의 부속암자가 있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전만 하더라도 현재 가람의 동쪽을 중심으로 수십 명의 학승들이 상주하던 큰 가람이 배치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방문일시: 2024년 6월 15일   경산시 남천면 산전리 경흥사    청도쪽으로 내려가면서 경산 남천쪽의 오래된 사찰인 경흥사 들러봤습니다.    경흥사 범종각  범종각 편액  동학산 경흥사  비천상   새벽예불 종송.. 2024. 6. 18.
포항 보경사(寶鏡寺) 포항 보경사(寶鏡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이다.602년(진평왕 24) 진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대덕(大德) 지명(智明)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602년 진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신라 지명법사가 진평왕에게'동해안 명산에서 명당을 찾아 자신이 진나라의 도인에게 받은 팔명보경을 묻고그 위에 불당을 세우면 왜구의 침입을 막고,이웃 나라의 침입도 받지 않으며 삼국을 통일할 것'이라고 하였다.이에 진평왕이 지명법사와 함께내연산 아래에 있는 큰 못에 팔면보경을 묻고 못을 메워금당을 건립하고 보경사라고 했다. 경내에는 보경사원진국사비(보물 252)와 보경사부도(보물 430)가 있으며조선 숙종의 친필 각판 및 5층석탑 등이 있다.      "보경사 주차장 주차비  무료보경사 입장료도 무료입니다.. 2024. 6. 17.
울산 신흥사,석조아미타여래좌상 울산 신흥사(新興寺) 신흥사는 울산 대안동 동대산 자락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통도사의 말사이다. 명랑대사가 신라 635년(선덕여왕 4)에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며, 창건 당시의 이름은 나라의 태평과 백성의 평안을 위한다는 뜻인 '건흥사(建興寺)'였다고 한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신흥사 위쪽 기박산성을 중심으로 울산의병이 일어놨는데, 당시에 신흥사 주지였던 지운스님이 왜군의 침략에 맞서 승병활동을 활발하게 펼쳤던 호국사찰이다. 이후 1597년 정류재란 때 왜군에 의해 사찰이 소실되었으나, 1646년(인조24)에 나라의 지원을 받아 경상좌병영 병마절도사 이급(李伋)에 의해 재건되었으며, 그로부터 3년 뒤인 1649년에는 현재 대웅전에 모셔진 석조아미타여래조상이 조성되었다. 뒤이어 16.. 2024. 6. 15.
밀양 예림서원(禮林書院) 밀양 예림서원(禮林書院)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예림서원은 조선시대 사림의 우두머리였던 점필재 김종직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1567년(명종 22) 밀양 부사 이경우가 창건하여 덕성서원이라 이름 붙였다. 뒤에 퇴계 이황이 김종직을 추앙하여 이름을 점필서원으로 바꾸고친필의 편액을 걸었으나 임진왜란으로 퇴락되어1606년(선조39) 위판을 봉안하고 서원을 중수하였다. 1635년(인조 13)지금의 상남면 예림리로 이건하였고1637년 사림의 공의로 예림서원으로 이름을 바꾸고박한주,신계성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1669년(현종 10) 사액서원이 되면서 나라의 지원을 받았고1680년(숙종 6) 화재로 묘우가 소실되어 지금의 위치로 다시 이건하였다. 1871년(고종 8) 서원철폐령으로 헐렸다가 건물이 하나둘 복구되면서오.. 2024. 6. 13.
밀양 김종직 선생 생가(추원재) 추원재(追遠齋) 조선시대 사림의 우두머리인 김종직과 아버지 김숙자가 살았던 터에 자리한 재사(齋舍)이다.아버지가 터를 잡고 아들이 평생 살았던 곳으로 '추원'은 '조상의 덕을 추모한다'라는 뜻입니다.       김종직 선생 생가로 가기 전 입구에 있는 김종직 선생 신도비   문충공 점필재 김선생 신도비      고려 말 우리나라에 들어온 성리학은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으로 이어집니다.부자는 문과에 금제한 뒤 벼슬길로 나아가 관리로서 많은 업적도 남겼지만성리학의 계보를 이어 뿌리 내리게 한 위대한 사상가였습니다. 조선시대 사림은 이곳을 정신적 고향으로 여기고 찾아와 두 사람의 학문적 정신을 기렸습니다.  그러나 김종직은 연산군 4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부관참시를 당합니다.그 후 자손들이 흩어지고 생가가.. 2024. 6. 12.
밀양 월연정(月淵亭),월연터널 밀양팔경 월연정(月淵亭) 월연정은 본래 월영사라는 사찰이 있던 곳으로한림학사를 지낸 월연 이태 선생이1520년에 세운 정사(亭舍)입니다. 월연정은 대청인 쌍경당과 월연대 등 주건물을 세우고이 건물들 외에 쌍청교,영월간,수조대,탁족암 등의 유적이 산재해 있습니다. 그는 한 해 전 *기묘사화가 일어나면서개혁을 주장하던 선비들이 무더기로 죽거나 파직 당하는 화를 입자,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월연대와 쌍경당을 짓고 은거했다고 하네요. *기묘사화는 중종 때 조광조 등 중앙 정계에 진출한 사림파가 개혁 정치를 펼치다1519년 무더기로 처형되거나 파직 당한 사건    월연정   월연정 입구 공터에 주차하고 걸어갑니다.  대나무숲을 지나 울창한 숲길을 지나니 고택이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입구에서 그리 멀지는 않았.. 2024. 6. 12.
밀양 용호정(龍湖亭) 혜산서원 들러보고 월연정 가는 길에도로 좌측으로 근사한 누각이 하나 보이길래 차를 세우고 찾아봤습니다.이름은 용호정이었고 좀 전에 다녀온 혜산서원의 격재 손조서 선생과 연관이 있는 곳이었네요.  용호정 지나쳐 와서 적당한 곳에 주차하고 둘러봅니다.    밀양 용호정(경남 밀양시 용평동 59-3)      용호정은 조선 세조 임금이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내려와 은둔한 격제 손조서를 모시기 위해일직 손씨 문중 묘소 아래에 지은 건축물이다. 추화산 끝자락에서 밀양강을 굽어보면서 주건물인 정당은 뒤쪽 높은 곳에,정문 격인 2층 누각인 심경루는 앞쪽 낮은 곳에 들어섰다.   용호정으로 드나드는 심경루(心鏡樓)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 누각이다.용호정, 심경루라는 이름은 호수처럼 잔잔한 강.. 2024. 6. 11.
밀양 혜산서원(惠山書院) 밀양 혜산서원(惠山書院)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격재 손조서는 계유정난(1453)으로 단종이 왕위에서 쫓겨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온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혜산 서원은 손조서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영조(1753)때 만들어진것으로, 원래 이름은 서산서원(西山書院)이었다. 서산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971년 혜산서원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들어섰다. 손조서뿐 아니라 전국 서원에 흩어져 있던 손씨 명현 네 사람의 신위도 함께 모셨다. 서원이 있는 다원마을은 곧 손씨 집성촌이다. 밀양 혜산서원 혜산서원이 있는 밀양 다죽리 다원마을 입구 모습 다죽리 다원1구 마을 유래가 적혀 있습니다. 다원마을이라고 한것은 차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붙여진 지명이며, 현재 600년 된 차나무가 .. 2024. 6. 11.
밀양 박연정(博淵亭) 밀양 박연정(博淵亭)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김태허(金太虛,1555-1620)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세운 별장이다. 무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아간 그는 왜군이 휩쓸고 지난간 지역의 군사와 백성을 규합해 적을 무찔렀고 울산 군수,창원 부사,충청 병사,오위도총부 도총관 등에 제수됐다. 조정이 어수선해지자 모정마을로 낙향해 1613년 동창천이 내려다보이는 관란정 옛터에 정자를 짓고 자신의 호를 따서 박연정(博淵亭)이라 불렀다. '박연'은 의 '溥博淵泉부박연천'에서 따온 말로 '하늘처럼 넓고, 연못처럼 깊다' 는 의미이다. 이후 화재로 불타버린 것을 1864년에 중건했다. 팔작지붕에 정면3칸, 측면 2칸 규모이다. 1938년 정문인 충의문(忠義門)을 중건하고, 1966년 재실인 .. 2024. 6. 11.